우리동네소개
군민이 행복한 도시형 농촌 보은입니다.신곡리
위치
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용호리, 서쪽은 어성리, 남쪽은 사음 사탄리, 북쪽은 남대문리와 접하고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한 홍인사가 있어 영당 또는 신읍 홍인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곡리, 양중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읍과 후곡의 이름을 따서 "신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수몰로 면사무소를 거교리로 이전하고 대부분 마을이 수몰 되었다.
자연마을
- 뒷골 : 양중지 동북쪽에 있는 마을
- 양중지 : 신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승지 벼슬한 사람이많이 났다고 한다.※수몰된 마을 : 새별, 영당(전 면소재지) 면사무소, 경찰지서, 회남국민학교, 우체국, 농협등이 모두 "거교리"로 이전하였다.
마을봉사자
- 이장 류중은
- 노인회장 강상만
광포1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용호리, 남쪽은 분저, 은운리, 북쪽은 조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널처럼 되었다하여 늘개미, 광포 또는 판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판장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청댐」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으며, 남원양씨 집성촌이었다. 판장리(板藏里) 명칭이 ‘널빤지 판, 감출 장’으로 ″시체를 널빤지에 넣어 감춘다″ 즉, 시체를 묻는 마을이란 의미로 그 뜻이 좋지 않아, 조선시대 사용하던 명칭인 넓은 포구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광포리(廣浦里, 넓을광 물가포)로 변경하여 사용하고자 하여 2019. 4. 1.부터 법정리, 행정리 명칭을 변경하였다.
자연마을
- 늘개미 : 지형이 널처럼 생겼다고 한다.
- 늘티 : 판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
- 도목 : 늘개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마을에 도를 닦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큰골 : 늘티 동북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김명선
- 부녀회장 구제순
광포2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용호리, 남쪽은 분저, 은운리, 북쪽은 조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널처럼 되었다하여 늘개미, 광포 또는 판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판장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청댐」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으며, 남원양씨 집성촌이었다. 판장리(板藏里) 명칭이 ‘널빤지 판, 감출 장’으로 ″시체를 널빤지에 넣어 감춘다″ 즉, 시체를 묻는 마을이란 의미로 그 뜻이 좋지 않아, 조선시대 사용하던 명칭인 넓은 포구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광포리(廣浦里, 넓을광 물가포)로 변경하여 사용하고자 하여 2019. 4. 1.부터 법정리, 행정리 명칭을 변경하였다.
자연마을
- 늘개미 : 지형이 널처럼 생겼다고 한다.
- 늘티 : 판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
- 도목 : 늘개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마을에 도를 닦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큰골 : 늘티 동북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김동진
- 부녀회장 김용진
조곡1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거교리, 남쪽은 판장리, 북쪽은 금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지역으로서 노성산과 호점산성 사이가 되므로 새실 또는 조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조곡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청댐」담수로 일부가 수몰 되었다.
자연마을
- 새실 : 조곡리 중심마을로 국사봉 서남쪽에 있으며, 옛부터 신령한 풀이 있어 "맛"이 좋기로 그지 없어 조곡리 풀을 먹으면 늙는것을 잊어 버린다고 하였다.
- 마전사 : 새실 동쪽「마전사」절터에 있는 마을. 마을 뒤엔 국사봉이 서있고, 그 남쪽엔 「기우제」를 올리던 우단이 있고, 그 아래 마전사지가 있는데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오실때 이 절에서 3일간 머물렀고 그 때 베옷을 빨아 말린 일이 있어 이름을 얻었다 한다.
전설 및 설화
마전사와 벼락바위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 2구 마을을 마전사라 부르고 있다.조선시대에 이 마을이 있는 곳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마전사는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오셨다가 서울로 돌아가실 때에 이 절에 오시어 며칠 계셨다고 한다.
세조는 이 절에서 옷도 빨아 입으시고 사승사냥도 하였다고 전한다.마전사가 마록사라고 달리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있는 후부터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절은 간데 없고 절이 있었다는 곳에는 마을이 생겨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전사 마을 앞 길가에 거의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바위가 서 있는데"벼락바위"라 부른다.
세조께서 이절에 다녀가셨을 무렵이라 한다.
이 절의 주지승은 평소 열심히 도를 닦아 자신이 득도한 도술은 감히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자부했고 세상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가질 만큼 도술에 능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절에 허름한 옷차림의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도승을 보니 눈빛이 찬란하고 온몸에 서리가 서려 있어 한눈에 보아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지승은 이 도승의 재주를 시험해 봄으로서 자신의 자괴지심을 풀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주시승은 밖으로 데리고 나와 "소승이 평소 요술을 익힌 바 있으니 한번 구경을 하고 그대로 할 수 있으면 해보시구려"했다.
이에 도사는’소승은 본시 탁발만 하였을 뿐 배운 것이 없어 어찌 대사와 더불어 도술을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겸손하게 사양을 했는데도
주지승은 말은 듣지 않고 말을 끌어온 후 사뿐히 등에 올라타서는"보시오. 내가 저 앞에 보이는 바위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재주를 부릴 터이니 객승도 한번 해 보시구려"했다.
그런데 도승이 주지승이 가리키는 바위를 보니 그 바위는 용좌 바위로 용궁에 있는 용왕이 1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 밖으로 나왔을 때 앉아 쉬는 자리였다.
도승은 크게 놀라 주지승의 말고비를 잡고 "대사, 다른 재주는 다 하셔도 좋으나 저 바위 위에 올라가시는 일은 마시옵소서"하고 만류했다.
주지승은 매우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저 바위가 무슨 바위요?"하고 물었다." 무슨바위인 줄은 소승이 알 수 없으나 보기에 매우 신성한 바위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시오. 쓸데없이 아는 체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요"하고 주지승은 바위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도승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자 황급히 절안으로 도망치듯 숨었다."보기보다는 겁이 많은 중이구나"주지승은 중얼거리며 단숨에 바위 위에 뛰어 올라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지면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다.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졌다. 하늘은 다시 쾌청해졌고 서쪽 하늘엔 샛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절에 숨어 있던 도승은 비로서 밖으로 나와 바위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참으로 보기에도 처절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바위와 함께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채로 두 동강이나 나 있었다.도승은 두 손을 합장하여 주지승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마전사 은행나무
옛날 조선시대때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 2구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암, 수의,두 은행나무가 있었다.
암나무는 절 경내에 있었고 또 한그루(수컷)는 동구밖에 있었다고 한다.
이 두나무는 서로 바라보며 때가 되면 열매를 많이 맺어 큰 소득이 되었으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주지승은 절 경내에 서 있는 한 그루를 베어 버리면 청소하기에 용이하다고 생각하고 베도록 하였으나
행자승들이 일제히 반대를 하고 협조하지 아니하므로 손수 큰 톱을 갖다 대고 베기 시작했다.
행자승들이 반대를 한 것은 비록 낙엽질 무렵에는 온 사찰 경내가 지저분하지만 경내에 은행나무가 있어야지 경관에 어울린다며 베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주지승이 나무를 베기 시작한지 사흘만에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에서는 우유빛 백색물이 솟아나왔고 나무를 벤 주지승은 톱을 쥔 채 현장에서 피를 쏟고 숨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고부터 절은 퇴락하게 되었고 이곳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동구밖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도 한달 전부터 울었고 6.25동란 때는 약1주일을 두고 마을이 울리도록 깊은 밤중에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에 나라에 변고를 미리 예고해 주는 신기한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보은군 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진섭
- 새마을지도자 황희명
- 부녀회장 최한성
- 노인회장 임갑동
조곡2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거교리, 남쪽은 판장리, 북쪽은 금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지역으로서 노성산과 호점산성 사이가 되므로 새실 또는 조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조곡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청댐」담수로 일부가 수몰 되었다.
자연마을
- 새실 : 조곡리 중심마을로 국사봉 서남쪽에 있으며, 옛부터 신령한 풀이 있어 "맛"이 좋기로 그지 없어 조곡리 풀을 먹으면 늙는것을 잊어 버린다고 하였다.
- 마전사 : 새실 동쪽「마전사」절터에 있는 마을. 마을 뒤엔 국사봉이 서있고, 그 남쪽엔 「기우제」를 올리던 우단이 있고, 그 아래 마전사지가 있는데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오실때 이 절에서 3일간 머물렀고 그 때 베옷을 빨아 말린 일이 있어 이름을 얻었다 한다.
전설 및 설화
마전사와 벼락바위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 2구 마을을 마전사라 부르고 있다.조선시대에 이 마을이 있는 곳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마전사는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오셨다가 서울로 돌아가실 때에 이 절에 오시어 며칠 계셨다고 한다.
세조는 이 절에서 옷도 빨아 입으시고 사승사냥도 하였다고 전한다.마전사가 마록사라고 달리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있는 후부터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절은 간데 없고 절이 있었다는 곳에는 마을이 생겨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마전사 마을 앞 길가에 거의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바위가 서 있는데"벼락바위"라 부른다.
세조께서 이절에 다녀가셨을 무렵이라 한다.
이 절의 주지승은 평소 열심히 도를 닦아 자신이 득도한 도술은 감히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자부했고 세상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가질 만큼 도술에 능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절에 허름한 옷차림의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도승을 보니 눈빛이 찬란하고 온몸에 서리가 서려 있어 한눈에 보아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지승은 이 도승의 재주를 시험해 봄으로서 자신의 자괴지심을 풀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주시승은 밖으로 데리고 나와 "소승이 평소 요술을 익힌 바 있으니 한번 구경을 하고 그대로 할 수 있으면 해보시구려"했다.
이에 도사는’소승은 본시 탁발만 하였을 뿐 배운 것이 없어 어찌 대사와 더불어 도술을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겸손하게 사양을 했는데도
주지승은 말은 듣지 않고 말을 끌어온 후 사뿐히 등에 올라타서는"보시오. 내가 저 앞에 보이는 바위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재주를 부릴 터이니 객승도 한번 해 보시구려"했다.
그런데 도승이 주지승이 가리키는 바위를 보니 그 바위는 용좌 바위로 용궁에 있는 용왕이 1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 밖으로 나왔을 때 앉아 쉬는 자리였다.
도승은 크게 놀라 주지승의 말고비를 잡고 "대사, 다른 재주는 다 하셔도 좋으나 저 바위 위에 올라가시는 일은 마시옵소서"하고 만류했다.
주지승은 매우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저 바위가 무슨 바위요?"하고 물었다." 무슨바위인 줄은 소승이 알 수 없으나 보기에 매우 신성한 바위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시오. 쓸데없이 아는 체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요"하고 주지승은 바위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도승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자 황급히 절안으로 도망치듯 숨었다."보기보다는 겁이 많은 중이구나"주지승은 중얼거리며 단숨에 바위 위에 뛰어 올라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지면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다.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졌다. 하늘은 다시 쾌청해졌고 서쪽 하늘엔 샛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절에 숨어 있던 도승은 비로서 밖으로 나와 바위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참으로 보기에도 처절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바위와 함께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채로 두 동강이나 나 있었다.도승은 두 손을 합장하여 주지승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마전사 은행나무
옛날 조선시대때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 2구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암, 수의,두 은행나무가 있었다.
암나무는 절 경내에 있었고 또 한그루(수컷)는 동구밖에 있었다고 한다.
이 두나무는 서로 바라보며 때가 되면 열매를 많이 맺어 큰 소득이 되었으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주지승은 절 경내에 서 있는 한 그루를 베어 버리면 청소하기에 용이하다고 생각하고 베도록 하였으나
행자승들이 일제히 반대를 하고 협조하지 아니하므로 손수 큰 톱을 갖다 대고 베기 시작했다.
행자승들이 반대를 한 것은 비록 낙엽질 무렵에는 온 사찰 경내가 지저분하지만 경내에 은행나무가 있어야지 경관에 어울린다며 베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주지승이 나무를 베기 시작한지 사흘만에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에서는 우유빛 백색물이 솟아나왔고 나무를 벤 주지승은 톱을 쥔 채 현장에서 피를 쏟고 숨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고부터 절은 퇴락하게 되었고 이곳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동구밖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도 한달 전부터 울었고 6.25동란 때는 약1주일을 두고 마을이 울리도록 깊은 밤중에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에 나라에 변고를 미리 예고해 주는 신기한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보은군 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곽현수
- 부녀회장 리경희
- 노인회장 이호종
거교1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신추, 금곡, 조곡리, 서는 남대문리, 남은 판장리, 북은 회인면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 큰 다리가 있어 것다리 또는 거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거교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대청댐」담수에 의하여 신곡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자연마을
- 것다리 : 큰다리가 마을앞에 있었다 한다. 청주한씨 세거지이다.
- 날방 : 1980년 대청댐 담수로 것다리 남쪽 산을 깍아 조성된 마을로 지대가 높다하여 "날방이"라 한다. 면소재지 마을※ 수몰된 마을 : 멱골 본말, 사당마루
마을봉사자
- 이장 강창희
- 새마을지도자 오응수
- 부녀회장 박상숙
- 노인회장 한영
거교2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신추, 금곡, 조곡리, 서는 남대문리, 남은 판장리, 북은 회인면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 큰 다리가 있어 것다리 또는 거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거교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대청댐」담수에 의하여 신곡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자연마을
- 것다리 : 큰다리가 마을앞에 있었다 한다. 청주한씨 세거지이다.
- 날방 : 1980년 대청댐 담수로 것다리 남쪽 산을 깍아 조성된 마을로 지대가 높다하여 "날방이"라 한다. 면소재지 마을※ 수몰된 마을 : 멱골 본말, 사당마루
마을봉사자
- 이장 유종오
- 부녀회장 박춘화
- 노인회장 반경순
금곡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2.2㎞ 지점인 동북쪽에 위치하여 동은 회인면, 서는 거교리, 남은 조곡리, 북은 신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쇠가 많이 났으므로 쇠실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승동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깨박-골[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깨를 많이 갈았다고 함.
- 느트-정[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함
- 쇠-실[마을] 금곡리의 중심마을.국사봉에서 파낸 쇠를 이곳에서 구워냈다고 함
- 스승-골[마을] 쇠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으며 중이 많았다고 함
- 양지-뜸[마을] 쇠실 통뫼산소를 중심으로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웃-말[마을] 쇠실 중앙 네거리를 중심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
- 음지-뜸[마을] 쇠실 통뫼 산소를 중심으로 음지쪽에 있는 마을
전설 및 설화
국사봉 돌무더기
보은군 회남면 금곡리 뒷산으로 회인면과의 경계의 높이 552m의 높은 산이 국사봉이다.
이 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산 정산부근은 굉장한 명당자리라 한다.
옛날 이 명당에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된다고는 하나 그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그 가뭄은 묘를 파내고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는 말하자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산으로 집안의 번성과 부귀를 노리고 이 산에 조상의 산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여러번 있는 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산 정상에는 웬일인지 큰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그리고 이 돌무더기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고려 때 지금의 회남면 금곡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외딴곳에 어느 과부가 두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부의 두 남매는 얼마나 용맹스럽고 날렵한지 몰랐다. 그뿐 아니라, 두 남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사는 과부이지만 두 남매만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과부는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밤마다 이 산의 신령이 나타나서 남매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어느날 저녁에 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신령이 나타났다.
신령은 매우 노하였고 큰호령으로 꾸짖기 시작했다."남매가 너무 비범해 둘 중하나가 죽지 않으면 천기를 다스릴 수 없을 터 인즉 더 이상 주저하면 하늘의 노여움이 크리라 "는 것이다.
과부는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남매를 앞에 앉혀 두고 어려운 내기를 시켰다. 내기에서 지는 쪽은 희생되어야한다고 하였다.
과부는 아들에게 나막신을 신고 당나귀를 끌고 하루 아침에 서울을 다녀오고 딸에게는 앞치마에 돌을 가지고 가 성을 쌓게 하였다.
어느덧 조금만 더 쌓으면 다 쌓게 되는데 아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내기에서 아들이 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생각인지라 과부는 딸을 죽이기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과부는 딸의 앞치마를 딸이 알지 못하게 찢어 놓았다.
딸은 자기보다 더 큰 돌을 굴리고 성을 쌓느라고 손바닥에 피가 흐르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오빠에게 질세라 열심히 돌을 주어 앞치마에 담았다.
그리고 매곡산을 향하여 가려하자 돌이 우르르 쏟아졌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찢어놓은 것을 모르는 딸은 쏱아진 돌을 다시 주어 담았고 걸음을 옮기려면 돌이 쏟아지고 그렇게 하는 중에 아들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딸은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산정에 있는 돌무더기는 바로 딸이 쏟아 놓은 돌들이라 한다.그리고 딸이 쌓다 완성치 못한 성이 회인면 중앙리 앞산에있는 아미산성이라는 것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현재
- 새마을지도자 최정희
- 부녀회장 최향순
- 노인회장 염근균, 정상강
신추리
위치
면의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쪽과 북쪽은 회인면, 서쪽은 거교리, 남쪽은 금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추, 하추동을 병합하여 "신추리"라 하고 보은군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가래을 : 신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에 마을앞 어울목에 큰 가래나무가 있었다 한다. 추자나무가 많이 있으며 상,하두개의마을로 나누어 부르고 있으며, 옛회인현의 중심지에 있던 마을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진곤
- 부녀회장 민병옥
- 노인회장 김진남
분저리
위치
면 소재지에서 8.4㎞ 지점으로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판장리와 은운리, 서와북은 용호리, 남은 서탄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지역으로서 고려때 최영장군이 군량을 모아서 가루로 만들어 군사에게 주었던 곳이라하여 분저실 또는 분저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저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고 서탄리와 송포리의 남은 지역을 흡수하였다.
자연마을
- 분저-실[마을] : 분저리의 중심되는 마을
- 아랫-말[마을] : 분저실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염성-골[마을] : 분저리 서쪽에 잇는 마을. 본래 용호리에 딸린 마을이었으나,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어 분저리에 속하게 되었음.
- 웃-말[마을] : 분저실의 위쪽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최병주
- 새마을지도자 최부건
- 부녀회장 이순희
- 노인회장 조태윤
은운리
위치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과남은 옥천군, 서는 분저리, 북은 판장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언목리, 지경리, 광성리와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은운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 되었다.
자연마을
- 을-미기 : 은운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여 있음
- 지경-말 : 을미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와의 경계를 사이 에 두고 양쪽으로 마을이 갈라져 있음
- 지장-골 : 지경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1980년 보은 수해로 폐동 되었음.
- 진주-골 : 지경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긴골짜기 밑이 됨. 중봉 조헌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함
마을봉사자
- 이장 김혁규
- 새마을지도자 강희용
- 부녀회장 고봉순
- 노인회장 김재철
사음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신고리, 용호리, 사탄리, 서는 법수리, 남은 대전광역시, 북은 매산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강외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마름처럼 생겼으므로 마름골 또는 사음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남 회덕군 주안면의 하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음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다.
자연마을
- 감탕-동 : 사음곡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 감초가 많이 났음.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 마름-골 : 사음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 새-동네 : 마름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새로 생겼음.
- 어부-동 : 마름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어부들이 많이 살았음.
- 재망-터 :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음
마을봉사자
- 이장 김상철
- 새마을지도자 이준범
- 부녀회장 소미숙
- 부녀회장 이연우, 김기석
법수리
위치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여 동은 사음리, 서는 청원군 문의면, 남은 대전광역시, 북은 산수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강외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에 법수사라는 절이 있어 법수골 또는 법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남 회덕군 주안 면의 하차리 일부를 병합하여 법수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고, 우무동 북쪽에 있는 마을부터 법수리, 산수리, 매산리, 사음리 등 4개리의 경계가 되는 곳을 행정구역 상 산수리로 하였다가 이후 2003년 12월 10일 법수1로 변경 되었다.
자연마을
- 날-망 : 우무동 북쪽에 있는 마을. 법수리, 산수리, 매산리,사음리등 4개리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넓고 평평하다.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이 곳에 여관, 음식점, 횟집, 교회, 시내버스종점 등이 세워졌다. 어부동날망 이라고도 부른다.
- 셋돌-바우 : 날망 서북쪽에 있는 마을. 법수에서 산수리 분모골로 가는 길목임.
마을봉사자
- 이장 김경애
- 부녀회장 김자행
우무동리
위치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여 동은 사음리, 서는 청원군 문의면, 남은 대전광역시, 북은 법수 1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강외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에 법수사라는 절이 있어 법수골 또는 법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남 회덕군 주안 면의 하차이 일부를 병합하여 법수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 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다.
자연마을
- 우무동 : 날망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소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에 큰 군창이 있어 하창리라고도 하였으며 20호가 되면 살던 사람이 이사를 하므로 항상 20호를 넘지않았다고 한다
- 원법수 : 우무동 서쪽에 있던 으뜸되는 마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선군
- 새마을지도자 김성희
- 부녀회장 김철중
산수리
위치
면이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매산리, 서와 북은 청원군 문의면, 남은 법수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강외면의 지역으로서 뒤에 산이 있고 앞에 강이 있어 산수가 매우 아름다워 산수골 또는 산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행정리를 병합하여 산수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다.
자연마을
- 덕고개-날망 : 어부동 날망 북쪽에 있는 마을. 대청댐 담수후 행정구역 개편시 산수리를 법수리에 폐합하였다가 법정리인 산수리를 부활시킬 때 편입된 마을임
- 분두-골 : 산수골 서불꼭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말처럼 생겼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분무-골 : 분두골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풀무처럼 생겼다고 하며 큰 정자가 있었다 함.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산수-골 : 산수리의 으뜸이 되는 마을
- 장성-말 : 산수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장이 섰었다 하여 ꡐ장선말ꡑ이라 부르던 것이 변한 것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음
마을봉사자
- 이장 양선석
- 새마을지도자 양승용
- 부녀회장 황윤임
- 노인회장 양선석
남대문리
위치
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거교리, 서는 청원군 문의면, 남은 어성리, 북은 회인면과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이 지역으로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 거구리와 후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거쿠-리 : 남대문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아홉사람의 부자가 세력을 피며 살았다고 함.
- 남대-문 : 남대문리의 중심마을, 호점산성의 남문밖이라고 함
- 만-마루 : 남대문 서북쪽에 있는 마을. 고려때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만지창을 만들었다고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양승대
- 새마을지도자 최종승
- 부녀회장 박인순
- 노인회장 양태원, 송경용
눌곡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2㎞ 지점인 면의 남부에 위치하여 동은 애곡리와 송평리, 서는 용곡리, 남은 죽암리, 북은 중앙리와 부수리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늪실 또는 눌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평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눌곡리라 해서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가달-피[마을] : 늪실 동쪽에 있었던 마을. 구들티가 변한 것으로 영해박씨 선대의 재실과 관리인이 살았으나 현재는 재실만 있음.
- 늪-실[마을] :눌곡리의 으뜸되는 마을.
- 양지-말[마을] : 늪실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편에 있는 마을.
- 오-가리[마을] : 늪실 남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 다섯 집이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음. 현재는 풍림정사만 있음.
- 음지-말[마을] : 늪실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음지편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유화순
- 새마을지도자 박안수
- 부녀회장 주원자
송평1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인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건천리, 서는 죽암리, 남은 회남면, 북은 눌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송리와 황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자송고 황평의 이름을 따서 송평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디-울[마을] : 송평리의 으뜸되는 마을. 지형이 "옥녀직금형"의 바디에 해당된다고 함. 옛날 마을 뒷산에 주자서원이 있었고, 앞에 붉은 소나무가 있어 자송이라 불렀다고 함. 송평2리가 됨.
- 황-버리[마을] : 바디울 북쪽에 있는 마을. 송평1리
마을봉사자
- 이장 홍순보
- 새마을지도자 조해수
- 부녀회장 이공순
송평2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인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건천리, 서는 죽암리, 남은 회남면, 북은 눌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송리와 황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자송고 황평의 이름을 따서 송평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디-울[마을] : 송평리의 으뜸되는 마을. 지형이 "옥녀직금형"의 바디에 해당된다고 함. 옛날 마을 뒷산에 주자서원이 있었고, 앞에 붉은 소나무가 있어 자송이라 불렀다고 함. 송평2리가 됨.
- 황-버리[마을] : 바디울 북쪽에 있는 마을. 송평1리
마을봉사자
- 이장 윤찬호
- 새마을지도자 양웅석
- 부녀회장 이재열
죽암1리
위치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송평리, 서쪽은 용곡리, 남쪽은 신대리와 회남면, 북쪽은 눌곡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면의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회인홍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회인현에는 이,홍, 장, 신, 최씨등이 대대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이 마을에 홍씨만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자연마을
- 죽바우 : 죽암리 중심 마을로 마을앞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자우또는 죽바우라 하였다.
- 새터 : 죽바우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유만형
- 새마을지도자 홍익표
- 부녀회장 김숙환
죽암2리
위치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송평리, 서쪽은 용곡리, 남쪽은 신대리와 회남면, 북쪽은 눌곡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면의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회인홍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회인현에는 이,홍, 장, 신, 최씨등이 대대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이 마을에 홍씨만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자연마을
- 죽바우 : 죽암리 중심 마을로 마을앞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자우또는 죽바우라 하였다.
- 새터 : 죽바우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양하석
- 새마을지도자 이필수
- 부녀회장 우숙이
신대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으로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회남면, 서는 용곡리, 북은 죽암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해서 새터 또는 신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고, 마을을 저지대에서 새로 개설된 도로 아래로 이전하였다.
자연마을
새-터[마을] : 신대리 마을. 처음에는 회인천 건너에 있는 죽암2리와 합쳐
마을봉사자
- 이장 양희천
- 새마을지도자 김홍은
- 부녀회장 정화영
용곡1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강병설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황인자
용곡2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동섭
- 새마을지도자 조성호
- 부녀회장 -
용곡3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계환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회남면 총무팀
- 전화번호 043)540-4241 ~ 47
- 최종수정일 202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