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소개
군민이 행복한 도시형 농촌 보은입니다.구티리
위치
면의 중심부에 있으며 동쪽은 탁주리, 서쪽은 봉계리, 남쪽은 아시, 문암리, 북쪽은 길탕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 거북티고개 아래 마을임으로 거북티 구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구티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거북티 : 마을, 입구의 산이 거북이와 흡사하여 구티라 하였는데 구티고개 아홉구비라 하여구티라 하였다고한다.
유래
영조때 윤휘동(尹彙東)이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에서 이주
1913. 5. 10일 면소재지를 원평리에서 이전
마을입구의 산이 거북과 흡사하다 하여 구티(龜峙)였는데 고개가 아홉구비라하여 구티(九峙)라 불려오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홍춘수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정문자
봉계1리
연혁은 신곡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병합하여 봉계리라 칭하고 1952년 1,2구로 분구하였으며 경기 파주장단에서 1540년경 구수팽씨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하였음
위치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동은 아시리,서남은 내북면,북은 길탕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 새실 또는 봉계, 신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상신리,사신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상신 : 봉계리 위쪽에 있는 마을
- 세거리 : 상신 남쪽에 있는 마을.보은 청주간 세 갈랫길이 있음
- 아랫말 : 상신리 아래 쪽에 있는 마을
- 안터 : 상신리 안쪽에 있는 마을
- 웃말 : 상신 위쪽에 있는 마을
- 중신 : 봉계리의 중간에 있는 마을
- 지디기 : 웃말 남쪽에 있는 긴 마을
- 하신 : 봉계 아래쪽에 있는 마을
유래
- 성종때 곽맹원(郭孟元)이 전북 고부에서 이주(봉계1)
- 순조때 최경하(崔景河)가 청원군 문의면 구룡리에서 이주(봉계1)
- 1519(중종14년) 기묘사화때 구수팽(具壽彭)이 경기도 파주 장단에서 이주
- 본래 새실. 신곡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계리라 불리우고 있으며 1952년 1.2리로 분구
- 자연마을으로는 상신(봉계1). 중신.하신(봉계2)의 3개 부락으로 나누어저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상우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최성자
봉계2리
연혁은 신곡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병합하여 봉계리라 칭하고 1952년 1,2구로 분구하였으며 경기 파주장단에서 1540년경 구수팽씨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하였음
위치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동은 아시리,서남은 내북면,북은 길탕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 새실 또는 봉계, 신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상신리,사신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상신 : 봉계리 위쪽에 있는 마을
- 세거리 : 상신 남쪽에 있는 마을.보은 청주간 세 갈랫길이 있음
- 아랫말 : 상신리 아래 쪽에 있는 마을
- 안터 : 상신리 안쪽에 있는 마을
- 웃말 : 상신 위쪽에 있는 마을
- 중신 : 봉계리의 중간에 있는 마을
- 지디기 : 웃말 남쪽에 있는 긴 마을
- 하신 : 봉계 아래쪽에 있는 마을
유래
- 성종때 곽맹원(郭孟元)이 전북 고부에서 이주(봉계1)
- 순조때 최경하(崔景河)가 청원군 문의면 구룡리에서 이주(봉계1)
- 1519(중종14년) 기묘사화때 구수팽(具壽彭)이 경기도 파주 장단에서 이주
- 본래 새실. 신곡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계리라 불리우고 있으며 1952년 1.2리로 분구
- 자연마을으로는 상신(봉계1). 중신.하신(봉계2)의 3개 부락으로 나누어저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구풍서
- 새마을지도자 구현서
- 부녀회장 이용구
아시리
위치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동은 문암리,서는 봉계리,남은 보은읍,북은 구티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 아시뱅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아시리라고 하였다.
자연마을
아시방이 : 지형이 집에 형국을 하고 있는데 마을이 있는 곳이 아씨방에 해당된다 하여 아씨방이라 부르던것이 변하였다고 한다.
유래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지형이 집의 형국을 하고 있어 아씨방(別堂)과 비슷 하여 아씨방으로 불려 오던 것이 변하여 현재는 아시방이. 아시뱅이로 되 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장훈
- 새마을지도자 송명근
- 부녀회장 이선자
문암리
위치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고 동은 탁주리,서는 아시리,남은 보은읍,북은 구티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문바우가 있음으로 문바우,또는 문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문암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뒷말(바깥곱냉이) : 곱냉이 바깥마을로 뒤에 있다고 해서 뒷말임.
- 밖곱냉기 : 곱냉기 바깥쪽에 있는 마을로 곡식이 곱으로 생산된다고 하여 곱냉이라고도 함.
- 안말(안곱냉이) : 곱냉기 안쪽에 있는 마을.
- 중간말(원곱냉기) : 안말과 뒷말 중간에 있는 마을.
유래
- 마을의 동북쪽(백석리 경계) 부근에 바위가 문처럼 양쪽에 웅장하게 버티 고 있어 문바우라 불리우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문암리(門岩里)라 불리운다
- 또한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여 농사를 지으면 다른 마을보다 곱이 난다하여 곱냉기로 불리우고 있다
- 자연마을은 밖곱냉기. 안곱냉기, 원곱냉기가 있다
전설 및 설화
마을의 수호신 장군석과 동자석
보은군 산외면 문암리와 구티리 경계선에 장군석과 동자석이라 부르는 조각품이 있다.
지금 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에 농사를 지으면 곱이 난다 하여"곱냄기"라고 하는 문암리에 터를 닦은 경주 김씨들은 학혈머리라는 명당에 선조의 산소를 만들고 마을과 자손들의 번성함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마을은 평온하지 못하였다. 매년마다 잡귀가 들어 사람들이 무단히 죽어가는가 하면 도적이 들어와서는 약탈과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해.
이 마을에 늙은 중이 나타나서 마을 주위에 동자석과 장군석을 깍아 세우면 마을이 평온하리라 예언을 하고 갔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동서남북 사방에 장군석과 동자석을 박아 세웠더니 마을의 환난이 사라졌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방의 장군석과 동자석은 없어지고 현재는 각각 1개만 남아 있어 옛날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가 되면 마을사람중에서 축관 한 사람과 제관 한 사람을 선정하여 이마을의 수호신인 장군석과 동자석에 제사를 지내 마을사람들의 무해, 무병, 무사를 기원하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장세근
- 새마을지도자 김홍민
- 부녀회장 김기희
백석1리
위치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동은 속리산면,서는 탁주리,남은 문암리,북은 장갑리에 접하여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흰 돌이 많이 있으므로 회돌이라 하던 것이 흔들 또는 백석이라 했는데,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갑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은점(백석사업장) : 1956년 피난민들이 모여 집단으로 개간하여 난민정착 사업장을 만들어 부자마을이 되었음.일제 시대 은광으로 각광을 받았던 마을이다.
유래
- 영조때 유정규(柳挺奎)가 청원군 낭성면 지산리에서 이주
- 흰돌(차돌)이 많아 흰돌. 흔들이라 불린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리(白石里)라 불리 었다
- 자연마을으로는 현재의 백석1리인 흰돌(마을앞에 큰 차돌이 있어유래)
- 백석2리인 은점(銀店) (은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어 명명)은 1956년 피난민이 집단적으로 들어와 개간하고 정착함으로 백석사업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류도열
- 새마을지도자 김대열
- 부녀회장 권금연
백석2리
위치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동은 속리산면,서는 탁주리,남은 문암리,북은 장갑리에 접하여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흰 돌이 많이 있으므로 회돌이라 하던 것이 흔들 또는 백석이라 했는데,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갑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은점(백석사업장) : 1956년 피난민들이 모여 집단으로 개간하여 난민정착 사업장을 만들어 부자마을이 되었음.일제 시대 은광으로 각광을 받았던 마을이다.
유래
- 영조때 유정규(柳挺奎)가 청원군 낭성면 지산리에서 이주
- 흰돌(차돌)이 많아 흰돌. 흔들이라 불린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리(白石里)라 불리 었다
- 자연마을으로는 현재의 백석1리인 흰돌(마을앞에 큰 차돌이 있어유래)
- 백석2리인 은점(銀店) (은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어 명명)은 1956년 피난민이 집단적으로 들어와 개간하고 정착함으로 백석사업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학제
- 새마을지도자 윤만호
- 부녀회장 배성자
장갑1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신정리, 서쪽은 동화, 원평리, 남쪽은 백석리, 북쪽은 대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러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악,벌말,궉말,안말,새말을 병합하여 "장갑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나매기 : 안말 써쪽에 있는 마을로 산 남쪽에 있다하여 남악이라 하였는데 그후 변하여 나매기라 한다하며 일설에는 옛날 장군이 나막신을 신고 다녀서 나매기라 한다고 한다.
- 궉말 : 안말 서남쪽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
- 벌말 : 궉말 서남족 들복판에 있는 마을 일설에는 임진왜란 파평윤씨가 수목을 베고 들어와 마음을 조성하였다.
- 안말 : 장갑리의 으뜸마을로안에 있는 마을
- 안나메기 : 궉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장갑리에서 맨 나중에 이룩되었다.
유래
- 선조때 윤수은(尹壽殷)이 경기도 파주에서 이주
- 헌종때 조효진(趙孝鎭)이 경북 선산군 선산면 죽장동에서 이주
- 철종때 유낙풍(劉洛豊)이 상주군 공성면 보현리에서 이주 - 철종때 김혜균(金惠均)이 경북 봉화군 재산면서 이주
- 고종때 이지영(李枝榮)이 진천군 이월면 송두리에서 이주
마을봉사자
- 이장 홍순관
- 새마을지도자 김성길
- 부녀회장 최정애
장갑2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신정리, 서쪽은 동화, 원평리, 남쪽은 백석리, 북쪽은 대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러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악,벌말,궉말,안말,새말을 병합하여 "장갑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나매기 : 안말 써쪽에 있는 마을로 산 남쪽에 있다하여 남악이라 하였는데 그후 변하여 나매기라 한다하며 일설에는 옛날 장군이 나막신을 신고 다녀서 나매기라 한다고 한다.
- 궉말 : 안말 서남쪽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
- 벌말 : 궉말 서남족 들복판에 있는 마을 일설에는 임진왜란 파평윤씨가 수목을 베고 들어와 마음을 조성하였다.
- 안말 : 장갑리의 으뜸마을로안에 있는 마을
- 안나메기 : 궉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장갑리에서 맨 나중에 이룩되었다.
유래
- 선조때 윤수은(尹壽殷)이 경기도 파주에서 이주
- 헌종때 조효진(趙孝鎭)이 경북 선산군 선산면 죽장동에서 이주
- 철종때 유낙풍(劉洛豊)이 상주군 공성면 보현리에서 이주 - 철종때 김혜균(金惠均)이 경북 봉화군 재산면서 이주
- 고종때 이지영(李枝榮)이 진천군 이월면 송두리에서 이주
마을봉사자
- 이장 김동수
- 새마을지도자 윤종섭
- 부녀회장 정금순
신정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경북 상주군, 서쪽은 장갑리, 남쪽은 속리산면, 북쪽은 대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써 바위가 많다하여 바위골 또는 암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신정리"라 고쳤다.
자연마을
바윗골 : 바위가 많아 바위골 또는 암동이라고 하며 아랫말 웃말로 구분 되어있다.
유래
- 1732(영조8)에 서만보(徐萬輔)가 충남 공주군 우성면 죽당리에서 아우와 함께 이주
- 바위가 많다하여 바위골. 암동(岩洞)이라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신정리라 불려오고 있다.
전설 및 설화
병풍바위와 장군석
보은군 산외면 신정리.이 마을을 "바윗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 길이 50m, 높이20m나 되는 큰바위가 서북방향으로 마치 병풍을 쳐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이 바위를 "병풍석"이라 부르고 있고 이바위 앞 200m지점에 "장군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야기다.
전쟁이 일어나 외적이 마을까지 쳐들어 왔다.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외적을 피하여 두시산에 있는 병풍바위로 피하여 갔다.
마침 병풍바위에는 작은 골방이 자연으로 형성되어 있어 모두 그리로 몰려 들어갔다.
마을에 쳐들어 온 외적은 마을 사람들을 뒤따라 성난 파도처럼 병풍바위를 향하여 달려 오고 있었다.온 마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기만 했다.
그때였다. 병풍바위 앞에 우뚝 솟아 있던 큰 바위하나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였다.
갑옷과 투구를 쓴 장군의 모습으로 변한 바위는 큰 칼을 들고 달려오는 외적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개미떠처럼 달려드는 외적을 장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쩌 마치 번개처럼 날쌔게 외적의 목을 풀잎베듯 쳐부수기 시작했다. 외적의 무수한 시체가 자꾸만 늘어갔다.
외적은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자 조수물처럼 밀려 도망 쳤다.
외적이 모두 물러가지 그렇게 용맹스러웠던 장군은 본래 모습처럼 다시 바위로 변하여 우뚝 서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장군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바윗곳"이란 마을의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명상
- 새마을지도자 김진호
- 부녀회장 이종복
신정리
위치
본면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동은 경상북도,서는 청원군 미원면,남은 장갑리,신정리,북은 괴산군 청천면에 접하여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함에 따라 여동.체항리.고점리를 병합하여 대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고점리 : 높은 제미 마을 이름이다.
- 높은제미 : 체메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근처에서 가장 높은 신성봉 산맥이 있음
- 여동골 : 대원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뒤에서 동자처럼 생긴 산이 있고,옛날에는 선녀들이 살았다고도 한다.
- 체메기 : 여동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 산맥이 체 모양으로 생겼으며,청원군을 넘나드는 길목이 된다.
유래
- 헌종때 김수각(金秀覺)이 청원군 북일면 학평리에서 이주
- 철종때 박진형(朴震炯)이 황해도 송화군 도원면에서 이주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여동골. 체항리. 고점리를 병합하여 대원리라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성석현
- 새마을지도자 김석환
- 부녀회장 오희숙
동화리
위치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동은 백석리,서는 탁주리,남은 구티리,북은 장갑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지형이 동아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동아목 또는 동화목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부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화리라 하였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들녘을 금밭들이라 하였는데 예전에 금이 나왔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6.25전란 중에도 한 명의 희생자가 없던 명당 마을이다.오늘날 고추와 담배 인삼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
- 고제 : 웃말 남쪽에 있는 높은 마을이라고 해서 붙인 말임
- 아랫말 : 고제 북쪽에 있는 마을.마을 가운데 아래에 있음.아랫곳말이라고도 부른다.
- 웃골말 : 아랫말 동쪽에 있는 마을.동화리 맨 위에 있음.
- 황곳말 : 아랫말 서북쪽에 있는마을.한끝말이던 것을 황곳말로 고쳐 부르게 됨.
유래
- 명종때 이문국(李文國)이 경북 구미에서 이주
- 마을의 지형이 동아의 목처럼 생곁다 하여 동아목으로 불리우다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시 상부평의 일부를 병합하여 동화리라 명칭
마을봉사자
- 이장 이민수
- 새마을지도자 이갑주
- 부녀회장 이종여
탁주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있으며 동쪽은 동화리, 서쪽은 길탕 구티리, 남쪽은 문암리, 북쪽은 오대 원평리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탑자봉아래 있어 탑자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동, 동화리 일부를 병합하여 "탁주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탑자리 : 탁주봉 아래에 있는 마을
- 목골 : 탑자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못이 있어 못골이라고도 한다.
유래
- 인조때 이민갑(李民甲)이 경기도에서 이주
- 탁자봉(해발 516m)밑에 있는 마을이라 탑자리로 불리우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시 지동과 동화리 일부를 병합하여 탁주리로 명명
마을봉사자
- 이장 현병용
- 새마을지도자 노윤호
- 부녀회장 서순이
탁주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장갑리, 서쪽은 오대리, 남쪽은 동화리, 북쪽은 청원군에 접해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추원이 있었으므로 원뜰 도는 원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삼부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평리"라 하였다. 1913년 이전까지 산외면 소재지였다.
자연마을
- 삼부평 : 원뜰 동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세 벙어리가 살았다 하여 삼버벌이라고도 부르며 세사람의 부자들이 우애있게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삼부평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주막 : 이 마을이 면소재지었을시 장이 섰고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 원들 : 조선시대에 관리와 행인의 숙식을 제공하던 추원이 있던 마을
유래
- 철종대 이규익(李圭翼)이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에서 이주
- 조선시대 행인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추원이 있어 원뜰로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상부평의 일부를 병합하여 원평리로 하고 면소재지를 구티리로 옴김
마을봉사자
- 이장 이관수
- 새마을지도자 백승현
- 부녀회장 이순옥
오대리
자연마을
- 건너말 : 냇물의 건너편에 있다하여 붙여짐
- 대말
- 중간말 : 마을의 중심이 되는 중간에 있다하여 붙여짐
- 새동네 : 1980년 수해로 인하여 새롭게 생긴마을
유래
- 숙종때 정동양(鄭東亮)이 옥천군 안남면 청정리에서 이주
- 1794(정조18년)에 박광일(朴光日)이 괴산군 청천면 귀만리에서 이주
마을봉사자
- 이장 유동열
- 새마을지도자 박환걸
- 부녀회장 서명희
산대1리
위치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동은 오대리,서는 이식리,중티리,남은 길탕리,북은 어온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산 속의 터가 되므로 산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포,재동,모정을 병합하여 산대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안모정 : 산대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200년전에 능성구씨 선조 모정이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 바깥모정 : 모정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
- 재경골 : 신개울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약 200년전 문화유씨재궁이 있었다 하며 재주가 좋은 사람이 많이나와 재궁이라고도 부른다.
유래
- 숙종때 유온(柳蘊)이 청주시 강서동 수락동에서 이주
- 정조때 김영수(金英秀)가 진천에서 이주
- 산속에 집터가 있다하여 산대(山垈)라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신포(신개울). 재동. 모정을 병합하여 산대리(山垈)라 불리움
마을봉사자
- 이장 조성춘
- 새마을지도자 조성준
- 부녀회장 김영미
산대2리
위치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동은 오대리,서는 이식리,중티리,남은 길탕리,북은 어온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산 속의 터가 되므로 산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포,재동,모정을 병합하여 산대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안모정 : 산대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200년전에 능성구씨 선조 모정이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 바깥모정 : 모정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
- 재경골 : 신개울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약 200년전 문화유씨재궁이 있었다 하며 재주가 좋은 사람이 많이나와 재궁이라고도 부른다.
유래
- 숙종때 유온(柳蘊)이 청주시 강서동 수락동에서 이주
- 정조때 김영수(金英秀)가 진천에서 이주
- 산속에 집터가 있다하여 산대(山垈)라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신포(신개울). 재동. 모정을 병합하여 산대리(山垈)라 불리움
마을봉사자
- 이장 유청열
- 새마을지도자 유재영
- 부녀회장 신경자
가고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과 북쪽은 청원군, 서쪽은 어온리, 남쪽은 오대리에 접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 옛날 어느 성이니 이 곳을 지나는 길에 지형이 높은 위치에 마을이 있어 더할나위없이 따뜻하고 아늑해 살기좋은 곳이라 하여 더구리 또는 덕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고리"라 하였다고 한다.
자연마을
더구리 : 마을이 산골자기 움폭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지말 중뜸 , 골말로 이루어졌다.
유래
- 1711(숙종37년)에 이인백(李寅白)이 청원군 미원면에서 이주
- 옛날 어느 성인이 이곳을 지나다 따뜻하고 아늑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더구리 또는 덕우리라 불림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양지말. 중동. 골말을 통합하여 가고리로 불림
마을봉사자
- 이장 이우성
- 새마을지도자 김대영
- 부녀회장 최향순
어온리
위치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가고리, 서쪽은 이식리, 남쪽은 산대리, 북쪽은 청원군과 접해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어은골, 은골 또는 어온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고리 일부를 병합하여 "어온리"라 하였다고한다.
자연마을
은-골 : 사화가 심할 때 선비들이 숨어 살기에 알맞다하여 은골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는 옛날에는 고기잡이 배가 이 마을까지드나들었는데 어구에 배가 닿으면 고기떼가 숨어들어 어은곡이라 하였다 한다.
유래
- 사화가 심할때 선비들이 은거하기에 알맞다 하여 은골이라 함
- 옛날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이곳 마을앞까지 드나 들었는데 어구에 배가 닿으면 고기떼가 숨어든다하여 어은곡(魚隱谷)이라 하였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가고리 일부를 병합하여 어온리라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송치헌
- 새마을지도자 이상석
- 부녀회장 송재숙
이식1리
위치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산대, 어온리, 서쪽은 내북면, 남쪽은 중티리, 북쪽은 청원군에 접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속리천으로 옛날에 배가 다녔고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 하여 배쉰개, 배진개, 주식포, 주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북면의 천산리를 병합하여 "이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양짓말 : 배진개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하여 양짓말 또는 웃말이라고부른다.
- 새말 : 배진개 아래에 새로 생긴 마을
- 밤소 : 배진개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 숲이 있었다고 하며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세게 불어 바람의 준말로 밤소라 하기도 하였다.
유래
- 인조때 안몽단(安夢丹)이 괴산군청천면 신월리에서 이주
- 옛날에 배가다녔고 배가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배쉰개. 배진개.주식포등 으로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내북면 천산리 (현재의이식2리)인 밤소를 병합하여 이식리라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안의상
- 새마을지도자 안성혁
- 부녀회장 이상애
이식2리
위치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산대, 어온리, 서쪽은 내북면, 남쪽은 중티리, 북쪽은 청원군에 접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속리천으로 옛날에 배가 다녔고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 하여 배쉰개, 배진개, 주식포, 주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북면의 천산리를 병합하여 "이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 양짓말 : 배진개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하여 양짓말 또는 웃말이라고부른다.
- 새말 : 배진개 아래에 새로 생긴 마을
- 밤소 : 배진개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 숲이 있었다고 하며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세게 불어 바람의 준말로 밤소라 하기도 하였다.
유래
- 인조때 안몽단(安夢丹)이 괴산군청천면 신월리에서 이주
- 옛날에 배가다녔고 배가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배쉰개. 배진개.주식포등 으로 불리우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내북면 천산리 (현재의이식2리)인 밤소를 병합하여 이식리라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최유상
- 새마을지도자 권영국
- 부녀회장 이선순
중티리
위치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산대리, 서쪽은 내북면, 남쪽은 길탕리, 북쪽은 이식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내북면 지역으로서 뒤에 중간 되는 고개가 있으므로 중티라 했다고도 하고 조선 성종시 개국공신 남재의 7대손 남충년이 낙향하던중 이곳 산수가 수려하고 토질이 양호하고 수맥이 풍부함으로 정착하고, 중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궉말 양지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중티리"라 하고 산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양짓말 : 웃말 동남쪽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
- 웃말 : 중티리 윗쪽에 있는 마을
- 아랫말 : 아래쪽에 있는 마을
유래
- 인조때 홍이행(洪滯行)이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에서 이주
- 1898(광무2년) 김노귀(金魯貴)가 청주에서 이주
- 본래 내북면 지역으로 고개가 있어 중티라 불림
- 조선 성종시 개국공신 남재의 7세손 남충년이 낙향하여 산수가 수려하고 토질이 양호하고 물이 풍부하여 정착하고 중터(中垈)하였다 한다
- 자연마을으로는 양짓말, 웃말(궉말, 번말,). 아랫말이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홍종국
- 새마을지도자 정주용
- 부녀회장 최일순
길탕1리
위치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동은 탁주리,서는 중티리,남은 봉계리,북은 산대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길동과 탕동을 병합하여 길탕리라 해서 산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도랫말 : 평진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평진말을 중심으로 돌아앉은 마을이라 도랫말이라고 함.
- 안말 : 질골의 중간에 있는 마을
- 질골 : 길탕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탕골에서 떡을 찌고,질골에서 질그릇을 설거지한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
- 탕골 : 질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뒤로는 시루산이 있고 시냇물이 시루산을 돌아내려 감으로 시루에 떡을 찐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함.
유래
- 1907년(순종1년)에 노병직(盧秉直)가 괴산군 청천면 삼인동에서 이주
- 본래 내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길동과 탕동을 병합하여 길탕리라 하고 산외면에 편입
마을봉사자
- 이장 변양수
- 새마을지도자 이창배
- 부녀회장 이병길
길탕2리
위치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동은 탁주리,서는 중티리,남은 봉계리,북은 산대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길동과 탕동을 병합하여 길탕리라 해서 산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도랫말 : 평진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평진말을 중심으로 돌아앉은 마을이라 도랫말이라고 함.
- 안말 : 질골의 중간에 있는 마을
- 질골 : 길탕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탕골에서 떡을 찌고,질골에서 질그릇을 설거지한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
- 탕골 : 질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뒤로는 시루산이 있고 시냇물이 시루산을 돌아내려 감으로 시루에 떡을 찐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함.
유래
- 1907년(순종1년)에 노병직(盧秉直)가 괴산군 청천면 삼인동에서 이주
- 본래 내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길동과 탕동을 병합하여 길탕리라 하고 산외면에 편입
자연경관
속리산 발원하는 시냇물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어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피서지로도 적합하여 이 고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충주 남한강 달천으로 가는 젖줄이다.충주에서 청주를 거쳐 보은으로 보은에서 상주를 있는 내륙 고속도로가 시루봉을 뚫고 이곳을 지나게 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종봉
- 새마을지도자 양승구
- 부녀회장 성영만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산외면 총무팀
- 전화번호 043)540-4331 ~ 35
- 최종수정일 202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