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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 혁명기념공원
  • 주소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동학로 236-22 동학농민 혁명기념공원
  • 문의보은군 산림녹지과(043-540-3214)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 중 하나인 보은군 성족리 일원에 조성된 공원으로 상징탑, 돌성, 민중의 광장, 하늘길 계단 등을 설치하여 동학운동의 이념과 역사적 가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자연친화형 생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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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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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 ‘동학대도소터’와 보은군 보은읍 북실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요 유적지이다. 장내리에 대도소를 두었던 동학교단이 전국의 동학도를 규합한 1893년 3월 보은취회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였다. 또한 장내리의 대도소는 동학농민혁명기에 북접동학농민혁명군의 지휘본부로 집결지 역할을 하였다.

그 때문에 보은 북실전적지는 우금치전투를 마치고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던 북접 소속 동학농민혁명군의 최후 전적지가 되었다. 이러한 보은의 동학유적지 유래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보은 동학농민혁명공원’이다.

보은읍 시가지에서 속리산을 가자면 말티재를 넘거나 동학터널을 지나야한다. 보은의 명승 삼년산성 아래 누청삼거리에서 동학터널로 길을 잡으면 2.5km 전방, 길 오른쪽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공원은 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 북실전적지를 조망할 수 있는 보은읍 성족리의 말티재 588봉 북동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시 근무하고 있어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대하여 자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Photo #01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입구 전경. 북실전적지가 있는 종곡리 이웃마을 성곡리를 지나는 37번국도를 이용하여 속리산을 가자면 길옆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표석이 반긴다.

Photo #02 19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조형물 전경. 주차장에 조성되어있는 이 조형물은 일본군의 경복궁침공, 청일전쟁발발, 청일전쟁 참화에 시달린백성들,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등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 된 일련의 사건을 그림과 글로 새겨 넣어 탐방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Photo #03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가는 길의 다리. 공원의 생태천에 놓여있는 이 다리는 주차장과 기념공원을 잇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보은, 그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다

‘주차장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을 새겨 넣은 조형본’이 조성되어있는 공원은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연표와 동학농민혁명사를 사진으로 볼 수 있는 통곡의 계단, 동학농민혁명사가 사건별로 새겨진 하늘계단 등이 설치되어 있다. 통곡의 계단과 하늘계단을 오르내리며 사진과 글을 접하다보면 동학운동의 이념과 역사적 가치에 대해 한층 다가 선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에 조성‧전시되어있는 기록들은 동학농민혁명과 보은, 그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고 있다.

보은군은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이자 교세를 떨쳤던 약속의 땅이었다. 교조 최재우를 처형한 이후에도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을 하고 있는 조정에 대항하여 동학교단 처음으로 동학교도 총 본부인 동학대도소를 두게 된다. 보은 장내리가 그곳. 1800년대 중반부터 장내리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하면서 격동의 교단역사를 써내려간 최시형이 고종에게 올릴 복합상소를 위한 대도소를 1893년 1월 설치한 것이다.

장내리 동학대도소 설치 후, 같은 해 2월 왕조정부를 상대로 포교를 공인받기 위한 광화문 상소운동은 결행되었으나 실패하기에 이르고, 이어 3월에는 전국의 동학교도들을 규합해 장내리에서 집회를 연다. “팔도의 모든 교인들은 보은 장안으로 집합하라”는 최시형의 지시에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동학교도 수만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이 집회에서는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척왜양창의’라는 외세 배격의 정치적 기치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Photo #04 생태천 다리를 건너면 공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공원에 조성된 작은 성은 동학대도소가 있던 장내리에 세운 성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성 축조당시 축조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긴장을 높이기도 했지만, 성으로서 군사적 기능보다는 군중의 집회장소로 알맞을만한 크기이고 실제 집회장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hoto #05 장내리 성 근경. 성벽위로 ‘척왜양창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성벽 아래에는 전봉준 유시를 비롯해 동학농민군과 관련이 있는 싯귀가 새겨진 조경석들이 놓여있어 그 정신을 탐방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Photo #06 성벽에는 조교 최제우(1824~1864)와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의 사진을 오석에 음각하여 전시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마주하는 느낌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Photo #07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전경.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탑이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이다. 오른쪽의 정자는 인내천정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Photo #08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전경. 공원 오른쪽 위로 솟아있는 산봉우리가 말티재 588봉이다. 오른쪽에 책을 펼쳐놓은 듯한 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 주요 연표이다.

Photo #09 동학농민혁명 주요연표. 1892년 서인주, 서병학이 최시형을 찾아가 교조 신원운동을 건의한 사실을 시작으로 1895년 4월 24일 전봉준, 성두환, 손화중, 김덕명, 최경성 등 농민혁명군 지도자가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4년간의 기록이 적혀있다.

 

또다시 타오른 보은 동학역사의 불길, 그러나 뜻은 스러지고

보은집회 이후인 1894년. 장내리에는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전라도에 이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오른 것이다. 최재우의 방포령에 동학교단을 따르는 북접농민군들은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에서 무장을 갖추고 보은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손병휘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의 호남 농민군과 합세하여 우금치 전투를 벌인다.

논산에서 남접농민군과 합세한 보은의 북접농민혁명군으로 구성된 남북접연합농민혁명군은 우금치전투에서 밀려나 해산하기에 이르고, 아울러 북접농민혁명군은 출전의 땅이었던 보은으로 돌아왔지만 숙영지인 북실에서 마지막 항전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수많은 동학농민혁명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있다.

 

 

Photo #10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통곡의 계단의 오른쪽 벽의 우금치전적지 사진과 안내글. 계단의 오른쪽 벽은 남‧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의 중요전적지와 동학정신을 이어받은 항일운동 전적지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있다.

Photo #11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통곡의 계단 왼쪽 벽의 장내리 사진과 안내글. 계단의 왼쪽 벽은 보은군의 역사에 비춰진 북접 동학혁명농민군 유적지와 전적지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있다.

Photo #12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통곡의 계단 왼쪽 벽의 북실전적지 사진과 안내글. 작은 야산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큰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위치하여 있는 북실마을은 모두 12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그 지형지세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Photo #13 통곡의 계단에 올라 바라본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Photo #14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전경1.

Photo #15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전경2.

 

 

 

Photo #16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의 동학농민혁명군 조각상. 처참한 전장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혁명군의 기개를 나타내고 있다.

Photo #17 뒤에서 바라본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의 동학농민혁명군 조각상. 북실전적지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위령탑을 세웠다.

Photo #18 위령탑의 오른쪽 날개부분. 위령탑 양옆으로 봄이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붉게 물든 진달래는 북실마을에서 숨져간 최후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상징한다.

Photo #19 산책로에서 바라본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Photo #20 왼쪽 날개에서 바라본 위령탑. 자연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민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Photo #21 측면에서 바라본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혁명군이 정신과 바라는 세상을 형상화 한 날개부의 안쪽 벽면 오석에는 질곡의 역사를 넘어 산화한 그들의 이야기가 새겨져있다.

 

동학운동의 중심 보은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후천개벽 사상과 함께 “마음속에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을 창도했던 최제우가 1864년 조정의 탄압에 의해 대구에서 처형된다. 이후, 2세 교주가 된 최시형은 동학이 여전히 탄압받는 상황이었지만, 경상도‧강원도‧전라도‧충청도를 순회‧포교활동을 하면서 교단조직을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시켰다.

당시 동학 포교의 중심지였던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있으면서 험준한 산골지역에 위치한 보은 장내리가 교단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은의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다. 보은은 위치상 각 지 역의 동학교도들을 규합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동으로는 경상도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전라도에, 서쪽으로는 공주‧홍성 등지로 갈 수 있으며, 서해안과 연결되어 있다. 북쪽으로 청주로 향하면 경기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더불어 보은 북쪽의 괴산‧충주를 지나 영월을 통하여 강원도로 갈 수 있다.

1890년대 들어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을 받는 교도들 또한 많아졌다. 따라서 동학교도들은 이러한 처지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그 방법으로 교조가 억울하게 처형되어 동학이 사교로 박해를 받고 있으니, 그 원통함을 풀어 동학에 대한 탄압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래서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게 교조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한다.

공주 삼례 집회가 실패로 끝나자 최시형과 동학교단은 포교를 공인 받기 위하여 고종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서 교도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교통이 편리하여 동학교도들이 오가기 쉬운 곳에 본부가 필요하였다. 그렇기에 1892년 12월 6일 고종에게 올릴 복합상소를 위한 도소를 보은 장내리에 두면서 동학 교단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본부를 가지게 되었다. 보은은 이로서 동학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Photo #22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을 내려서면 하늘계단이 나타난다.

Photo #23 굽이친 하늘계단의 굽이마다 동학농민혁명의 이야기가 탐방객을 맞이한다.

Photo #24 하늘계단에서 바라본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Photo #25 그늘진 굽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이야기와 함께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Photo #26 하늘계단을 지나면 성 안 민중광장으로 내려서게 된다.

Photo #27 하늘계단의 끝에서 바라본 민중광장.

Photo #28 민중광장 전경. 광장의 중앙 너머로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이 우뚝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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