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소개
군민이 행복한 도시형 농촌 보은입니다.중앙1리
위치
면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은 부수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눌곡리, 북쪽은 용촌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청 소재지로 회인군 읍내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근동과 사동, 눌곡리, 평창리의일부를 병합하여 면의 중앙이 되므로 "중앙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뒷산을 송정봉으로 그정상에 옛날에 "기우제"를 올리던 우단이 있고, 백학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송정봉 왼쪽은 사직봉으로 사직단이 있고, 오른쪽은 금수봉이며 봉아래 돌출된 언덕은 말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파평윤씨, 남양홍씨, 경주최씨, 장기정씨등이 향리로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 마평 : 중심마을로 장이서는 저자거리로 말들이라고도 한다.
- 옥도래 : 마평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해 옥터였다고 한다.
- 사자-골 : 마평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뒤에 사직단이 있다.
- 하마-실 : 마평 서쪽에 있는 마을로옛날 현감이 이 곳을 통과할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한다.
전설 및 설화
최영장군의 말무덤과 말채나무
최영 장군은 고려말의 명장이다.
그의 출생지가 어느 곳인가에 대하여는 뚜렷한 역사적 뒷받침이 없으나 우리 군지는 그를 우리 고장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회인면과 회남면에 전해오고 있다.
회인면에 전해 오는 이야기는 매곡산성이 바로 장군이 만든 성이고 이 산성에서 말타고 칼쓰는 무예를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회남면에는 지금은 대청댐을 수몰된 사탄리라는 마을에 말채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장군의 말과 화살이 이미 지나 갔는지라,
말의 목을 치고 돌아서려 하자 비로소 화살이 날아옴으로 크게 탄식하고 채찍을 땅에 묻었는데 그대로 잎이 나고 큰 것이 라고 전하여 왔다.
또 회인면 중앙리에 말무덤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이 말무덤이 장군의 애마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다.
옛날 고려 때 이야기다. 장군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할 때 장군에게는 참으로 장 달리는 말이 있었다.장군이 이 말을 매우 사랑하여 항상 타고 다녔다.
장군이 큰 뜻을 품고 그때 서울이었던 개성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 말의 주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매곡성에서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고 말을 달리게 한 후
이 지점에 당도하니 화살이보이지 않는지라 이와 같은 느린 말로서는 도저히 자신의 큰 뜻을 펴보지 못할 것을 알고 화를 내면서 단칼에 말의 목을 치고나자
하늘에서 화살이 그제서야 떨어지는지라 장군은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다 말을 묻었다고 한다.
(어떤이는 최영장군이 아니라 조재룡이란 장사라는 이도 있음)
그리하여 말무덤을 중심으로 무덤아래 마을을 "하마실"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년전에 이 말무덤이란 곳에 개간을 하여 밭을 일구자 말의 뼈가 나왔다고 마을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회인팔경
옛 백제시대부터 고을이었던 지금의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를 중심으로 한 곳에 팔경이 있다 하여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이 사랑하던 경승이다.
그 첫째가 "아미반월"이라 하니 아미산성에 걸려 있는 조각달을 말한다.
그 두번째가 "남계어화"이라 하니 남쪽시냇가,즉 속칭"밤샘"라고 부르는 시냇가에서 밤고기를 잡는 광경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횃불을 여기저기서 밝히고 고기를 잡던 선인들의 운치가 마냥 그립다.
그 셋이 "북수청풍"이니 여름철에 북쭉에 있는 숲속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말함이다. 속칭"웃수머리"라고 불리는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
지금도 느티나무가 더러 남아 있지만 옛날에 이곳에 큰 나무숲이 아름다움을 표시한 것이다.
그 넷째가 "옥녀탄금" 이니 옥녀봉에서 거문고를 타며 즐기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다음이"금수단풍"이니 금수봉의 단풍이 든 가을철의 모양이다.
여섯째가 "송정백학"인 송정봉 소나무 가지에 하얗게 날아와 앉던 백학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일곱째가 "사직취송"이니 사직단 봉우리에 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말한다.
끝으로 "부수단하"이니 부수봉에 아침 노을을 말하는 것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안병철
- 새마을지도자 신송우
- 부녀회장 강옥녀
중앙2리
위치
면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은 부수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눌곡리, 북쪽은 용촌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청 소재지로 회인군 읍내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근동과 사동, 눌곡리, 평창리의일부를 병합하여 면의 중앙이 되므로 "중앙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뒷산을 송정봉으로 그정상에 옛날에 "기우제"를 올리던 우단이 있고, 백학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송정봉 왼쪽은 사직봉으로 사직단이 있고, 오른쪽은 금수봉이며 봉아래 돌출된 언덕은 말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파평윤씨, 남양홍씨, 경주최씨, 장기정씨등이 향리로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 마평 : 중심마을로 장이서는 저자거리로 말들이라고도 한다.
- 옥도래 : 마평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해 옥터였다고 한다.
- 사자-골 : 마평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뒤에 사직단이 있다.
- 하마-실 : 마평 서쪽에 있는 마을로옛날 현감이 이 곳을 통과할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한다.
전설 및 설화
최영장군의 말무덤과 말채나무
최영 장군은 고려말의 명장이다.
그의 출생지가 어느 곳인가에 대하여는 뚜렷한 역사적 뒷받침이 없으나 우리 군지는 그를 우리 고장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회인면과 회남면에 전해오고 있다.
회인면에 전해 오는 이야기는 매곡산성이 바로 장군이 만든 성이고 이 산성에서 말타고 칼쓰는 무예를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회남면에는 지금은 대청댐을 수몰된 사탄리라는 마을에 말채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장군의 말과 화살이 이미 지나 갔는지라,
말의 목을 치고 돌아서려 하자 비로소 화살이 날아옴으로 크게 탄식하고 채찍을 땅에 묻었는데 그대로 잎이 나고 큰 것이 라고 전하여 왔다.
또 회인면 중앙리에 말무덤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이 말무덤이 장군의 애마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다.
옛날 고려 때 이야기다. 장군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할 때 장군에게는 참으로 장 달리는 말이 있었다.장군이 이 말을 매우 사랑하여 항상 타고 다녔다.
장군이 큰 뜻을 품고 그때 서울이었던 개성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 말의 주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매곡성에서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고 말을 달리게 한 후
이 지점에 당도하니 화살이보이지 않는지라 이와 같은 느린 말로서는 도저히 자신의 큰 뜻을 펴보지 못할 것을 알고 화를 내면서 단칼에 말의 목을 치고나자
하늘에서 화살이 그제서야 떨어지는지라 장군은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다 말을 묻었다고 한다.
(어떤이는 최영장군이 아니라 조재룡이란 장사라는 이도 있음)
그리하여 말무덤을 중심으로 무덤아래 마을을 "하마실"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년전에 이 말무덤이란 곳에 개간을 하여 밭을 일구자 말의 뼈가 나왔다고 마을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회인팔경
옛 백제시대부터 고을이었던 지금의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를 중심으로 한 곳에 팔경이 있다 하여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이 사랑하던 경승이다.
그 첫째가 "아미반월"이라 하니 아미산성에 걸려 있는 조각달을 말한다.
그 두번째가 "남계어화"이라 하니 남쪽시냇가,즉 속칭"밤샘"라고 부르는 시냇가에서 밤고기를 잡는 광경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횃불을 여기저기서 밝히고 고기를 잡던 선인들의 운치가 마냥 그립다.
그 셋이 "북수청풍"이니 여름철에 북쭉에 있는 숲속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말함이다. 속칭"웃수머리"라고 불리는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
지금도 느티나무가 더러 남아 있지만 옛날에 이곳에 큰 나무숲이 아름다움을 표시한 것이다.
그 넷째가 "옥녀탄금" 이니 옥녀봉에서 거문고를 타며 즐기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다음이"금수단풍"이니 금수봉의 단풍이 든 가을철의 모양이다.
여섯째가 "송정백학"인 송정봉 소나무 가지에 하얗게 날아와 앉던 백학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일곱째가 "사직취송"이니 사직단 봉우리에 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말한다.
끝으로 "부수단하"이니 부수봉에 아침 노을을 말하는 것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우하제
- 새마을지도자 오영수
- 부녀회장 박연옥
용촌1리
위치
면의 중앙에 취이하며 동쪽은 애곡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중앙리, 북쪽은 오동리와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동, 용상동, 신총등을 병합하여 용상과 신촌이 이름을 따서 "용촌리" 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갯-골 : 새터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 따뜻하여 꽃이 일찍 피는 마을이라 한다.
- 새-말 : 갯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마을이 이루어져 새말이라 부른다.
- 새터-말 : 용촌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약 160여년전에 새로 이룩된 마을
- 용상골 -갯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바위에서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숫돌이 많아 문의와 청주등지에서 이를 채취하여 팔려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던 마을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오연구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정인자
용촌2리
위치
면의 중앙에 취이하며 동쪽은 애곡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중앙리, 북쪽은 오동리와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동, 용상동, 신총등을 병합하여 용상과 신촌이 이름을 따서 "용촌리" 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갯-골 : 새터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 따뜻하여 꽃이 일찍 피는 마을이라 한다.
- 새-말 : 갯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마을이 이루어져 새말이라 부른다.
- 새터-말 : 용촌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약 160여년전에 새로 이룩된 마을
- 용상골 -갯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바위에서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숫돌이 많아 문의와 청주등지에서 이를 채취하여 팔려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던 마을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복석
- 새마을지도자 강태구
- 부녀회장 윤금순
오동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4㎞ 지점인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신문리, 서와 북은 청원군, 남은 고석리와 용촌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오동나무가 있었으므로 먹울 또는 오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동리라해서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먹-울[마을] : 마을의 형태가 큰 새가 오동나무에 집을 짓는 모양과 닮았다고 함. 이 변하여 이 되었음. 는 의 고어임. 옛부터 회인현 고을 내에서 사람이 살기가 제일 좋다고 일러왔다.
- 양지-말[마을] : 오동리 동북쪽 양지에 있는 마을.
- 음지-말[마을] : 양지말 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 큰 느티나무가 있어 이라고도 한다.
전설 및 설화
피발령과 수리티재
청주에서 화인을 경유하여 보은으로 오는 국도에 청원군과 보은군계에 "피발령"이란 높은 고개에 있고
회인면과 수한면계에 "수리티재"가 있는데 이 두 고개의 이름이 붙게된 데에 오리대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오리대감 이란 조선 선조임금 때부터 인조임금에 이르기까지 세분의 임금을 영의정으로 보필한 이원익 선생으로 그는 키가 남달리 작은 분으로도 유명한 분이다.
그는 천성이 단조롭고 대쪽같이 곧아서 자기의 할 일만 할뿐이고 남과 번잡스럽게 어울린다거나 자기를 남에게 알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또 지극히 소탈하고 검소하며 정승을 오래 지냈으나 그가 사는 집은 비바람 조차도 피하기 어려운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초가집이었고
늙어 병들어 죽을 때는 약 한 첩 쓸 여유는 물론 끼니조차도 변변하지 못했다는 분으로 많은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그 분이 경주목사가 되어 부임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청주에 도착하니 경주호장를 가지고 마중을 나오 있었다.
신임사또인 오리대감은 그때부터 사인교를 타고 임지인 경주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음력 6월로서 여간 더운 날이 아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가마를 메고 가자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고 호장은 호장대로 옷이 비에 젖은 것처럼 땀에 젖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청주에서 떠난지 한나절쯤 걸어가니 크고 험한 고개가 나타났다.
평지를 걸어도 죽을 지경인데 가마를 메고 한낮에 고개를 넘을 가마꾼도 가마꾼이지만 호장이 사또를 보니
키는 겨우 난쟁이를 면한 작은 키에 가마 위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우에 산천을 둘러보며 거드럭거리고 있는지라
저 키 작은 사또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 한번 골려줄 생각이 났다.호장은 고개 밑에 이르자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사또 앞에
나아가 허리를 굽힌 후 "사또 이 고개는 삼남지방에서 제일 높은 고개이온데 만약 이고개를 가마를 타시고 넘을 경우에는 가마꾼들이
피곤하여 회인가서 3~4일 유슉하여야 합니다."하니 "하루속히 당도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할 형편인데 도중에 지체할 수야 있느냐?
내 걸어서 고개를 넘을 것이다."하고 성큼성큼 고개를 걸어 넘다보니 호장이 히죽이죽 웃으며 따라 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호장의 장난을
알아차린 오리대감은 속으로 (이런 못된 놈이 있나?)하고는 걸음을 멈춘 뒤 따라오는 호장을 향하여 "여봐라! 너와 나는 신분이 다르거늘
내가 걷는데 어찌 너도 걷는단 말이냐? 내가 걸으면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하느리라"사또의 명령에 호장은 양손과 무릎을 발로 삼아
험난한 고개를 기어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고개마루에 올라와 보니 호장의 손바닥과 무릎에는 온통 피가 나와서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여 호장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회인에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보은으로 오는 도중에 다시 험한 고개에 닿았고 호장이 또 이 고개를 걸어서 넘으라고 하면 다시 기어오르라 할 것이 무서워
나무를 베어서 수레를 만들도록 한 후 수레위에 사인교를 태운 후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 "피발" 이 되어 넘었다 하여 "피발령" 수레로 넘었으므로 "수리티재"라고 불렀으며 한문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피발령은 피반령으로,
수리티재는 차령이라 표기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피발령 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피발령을 넘어 화인으로 오는 길목에 고개아래 오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을 지나 한 이리쯤 오면 고석리와의 갈림길이 있고 이 갈림길이 있는 곳에 "사근다리"라는 다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대장 이여송은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의 산천을 보니 정기가 빼어났으므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요, 조선에 많은 인재가 나면 대국인 명나라에 큰화가 미칠 것이므로 산맥을 끊어 지맥을 없애고자 산천의 지형을 자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 이여송이가 싸움이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다보니 산천 정기가 특출하므로 군사들에게 산허리를 끊도록 명령하였다.
군사들이 칼과 곡갱이 등으로 산허리를 자르자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 피는 내를 이루어 흐르기 시작하여 지혈이 끊어진 곳에서 10리나 되는 지점까지 흘러가 없어졌다.
이리하여 피가 쏟아진 고개라 하여 이름을 "피반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피가 삭아 없어진 지점을 "사근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고상배
- 새마을지도자 권영선
- 부녀회장 한가경
신문리
위치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쌍암리, 서쪽은 오동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청원군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마을앞 입구에 산들이 마치 "문"처럼 생겨 산문리(살무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을 병합하여 "신문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제주고씨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살구나무가 많아 살무니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자연마을
- 웃말 : 신문리 위쪽에 위치한 마을
- 평지말 : 웃말 동남쪽 평지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고상진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서순자
고석리
위치
면소재지로부터 4㎞ 지점인 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갈티리와 애곡리, 서는 오동리와 신문리, 남은 용촌리, 북은 쌍암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초천리 입석리와 동면의 계암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고초천과 입석에서 따서 고석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고새-별[마을] : 고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전에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중이 절을 떠나며 이별했다 하여 고사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고새별이 되었다고 하며 큰 들이 있고 들에 풀이 무성하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내를 이루어 고초리, 고초천리라 하기도 함.
- 선-돌[마을] : 고새별 서남쪽에 있는 마을. 처음 마을을 설립할 때 마을 표지로 큰 돌을 세웠다고 함.
- 양지-말[마을] : 고새별에서 양지쪽으로 있는 마을.
- 음지-말[마을] : 고새별에서 음지쪽으로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류제동
- 새마을지도자 류제관
- 부녀회장 김정임
계암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북면, 서쪽은 신문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내북면과 청원군에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개동, 능암리, 계암리를 병합하여 능암과 계암의 이름에서 따라 "쌍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능암 : 쌍암리의 중심마을 고려때 웅암사란 절이 있던 곳으로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겼다하여 웅자에서 아래 네점을 버리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동재정씨 집성촌이다.
- 지바우 : 능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 계목와 큰 바위가 있다.
- 초갯-골 : 능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풀이 무성하였다 한다.
전설 및 설화
장수굴
보은군 회인면 능암리 마을 뒷산에 "장수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조선 선조때의 이야기다.
이 굴에 장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고목나무를 한손으로 뿌리째 뽑았으며 한번에 큰 돼지 한 마리와 술 세동이나 먹었으나 그렇다고 특출한 무예는 없었다.
매일 열자나 되는 긴 창을 들고 다녔으나 사냥조차 제대로 못하였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잠이 들면 석달 열흘간이나 쿨쿨 잠만 잤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졸지장의 명색만 장수"라고 비웃었으며 흑심한 사람은 "미치광이장수"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내색도 않고 소같이 많이 먹고 배부르면 다시 굴안에 들어가 세상 모르게 잠만 잤다.
어쩌다 그가 마을 앞에 나타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치광이 장수"라고 놀려 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왜놈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이곳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왜병을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굴안에서 잠을 자던 장수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장수는 한 손에 긴창을 들고 왜병을 상대하여 싸우기 시작했는데 빠르기가 바람같았다.
한손으로 왜병 두명을 한꺼번에 번쩍 들어 집어 던지는가 하면 한창에 적병을 십명씩이나 곶감끼듯 찔러 버렸다.
왜적은 감히 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장수는 그제서야 다시 술과 고기를 청하여 배부리게 먹고 "나는 이제 속리산 문장대로 간다"하면서 굴안을 들어갔다.
그 뒤 세월이 1년이 지나도록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굴속들은 굴속에 불을 때면 연기를 못참고 장수가 굴밖으로 나올것이라 믿고 나무를 때기 시작했다.
아무리 며칠을 두고 불을 때었지만 연기가 문장대로 나올 뿐 장수는 영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장수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계속하여 불을 때면 속리산 문장대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상환
- 새마을지도자 정상문
- 부녀회장 이성시
능암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북면, 서쪽은 신문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내북면과 청원군에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개동, 능암리, 계암리를 병합하여 능암과 계암의 이름에서 따라 "쌍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능암 : 쌍암리의 중심마을 고려때 웅암사란 절이 있던 곳으로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겼다하여 웅자에서 아래 네점을 버리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동재정씨 집성촌이다.
- 지바우 : 능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 계목와 큰 바위가 있다.
- 초갯-골 : 능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풀이 무성하였다 한다.
전설 및 설화
장수굴
보은군 회인면 능암리 마을 뒷산에 "장수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조선 선조때의 이야기다.
이 굴에 장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고목나무를 한손으로 뿌리째 뽑았으며 한번에 큰 돼지 한 마리와 술 세동이나 먹었으나 그렇다고 특출한 무예는 없었다.
매일 열자나 되는 긴 창을 들고 다녔으나 사냥조차 제대로 못하였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잠이 들면 석달 열흘간이나 쿨쿨 잠만 잤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졸지장의 명색만 장수"라고 비웃었으며 흑심한 사람은 "미치광이장수"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내색도 않고 소같이 많이 먹고 배부르면 다시 굴안에 들어가 세상 모르게 잠만 잤다.
어쩌다 그가 마을 앞에 나타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치광이 장수"라고 놀려 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왜놈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이곳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왜병을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굴안에서 잠을 자던 장수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장수는 한 손에 긴창을 들고 왜병을 상대하여 싸우기 시작했는데 빠르기가 바람같았다.
한손으로 왜병 두명을 한꺼번에 번쩍 들어 집어 던지는가 하면 한창에 적병을 십명씩이나 곶감끼듯 찔러 버렸다.
왜적은 감히 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장수는 그제서야 다시 술과 고기를 청하여 배부리게 먹고 "나는 이제 속리산 문장대로 간다"하면서 굴안을 들어갔다.
그 뒤 세월이 1년이 지나도록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굴속들은 굴속에 불을 때면 연기를 못참고 장수가 굴밖으로 나올것이라 믿고 나무를 때기 시작했다.
아무리 며칠을 두고 불을 때었지만 연기가 문장대로 나올 뿐 장수는 영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장수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계속하여 불을 때면 속리산 문장대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상설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장문자
초개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북면, 서쪽은 신문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내북면과 청원군에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개동, 능암리, 계암리를 병합하여 능암과 계암의 이름에서 따라 "쌍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능암 : 쌍암리의 중심마을 고려때 웅암사란 절이 있던 곳으로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겼다하여 웅자에서 아래 네점을 버리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동재정씨 집성촌이다.
- 지바우 : 능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 계목와 큰 바위가 있다.
- 초갯-골 : 능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풀이 무성하였다 한다.
전설 및 설화
장수굴
보은군 회인면 능암리 마을 뒷산에 "장수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조선 선조때의 이야기다.
이 굴에 장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고목나무를 한손으로 뿌리째 뽑았으며 한번에 큰 돼지 한 마리와 술 세동이나 먹었으나 그렇다고 특출한 무예는 없었다.
매일 열자나 되는 긴 창을 들고 다녔으나 사냥조차 제대로 못하였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잠이 들면 석달 열흘간이나 쿨쿨 잠만 잤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졸지장의 명색만 장수"라고 비웃었으며 흑심한 사람은 "미치광이장수"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내색도 않고 소같이 많이 먹고 배부르면 다시 굴안에 들어가 세상 모르게 잠만 잤다.
어쩌다 그가 마을 앞에 나타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치광이 장수"라고 놀려 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왜놈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이곳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왜병을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굴안에서 잠을 자던 장수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장수는 한 손에 긴창을 들고 왜병을 상대하여 싸우기 시작했는데 빠르기가 바람같았다.
한손으로 왜병 두명을 한꺼번에 번쩍 들어 집어 던지는가 하면 한창에 적병을 십명씩이나 곶감끼듯 찔러 버렸다.
왜적은 감히 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장수는 그제서야 다시 술과 고기를 청하여 배부리게 먹고 "나는 이제 속리산 문장대로 간다"하면서 굴안을 들어갔다.
그 뒤 세월이 1년이 지나도록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굴속들은 굴속에 불을 때면 연기를 못참고 장수가 굴밖으로 나올것이라 믿고 나무를 때기 시작했다.
아무리 며칠을 두고 불을 때었지만 연기가 문장대로 나올 뿐 장수는 영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장수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계속하여 불을 때면 속리산 문장대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임웅철
- 새마을지도자 노창우
- 부녀회장 -
갈티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북면, 서쪽은 고석리, 남쪽은 애곡리, 북쪽은 내북면에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칡이 많은 고개 아래가 되므로 갈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티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갈-티[마을] : 갈티리의 으뜸되는 마을. 칡이 많았다 함.
마을봉사자
- 이장 최형모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공석
건천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5㎞ 지점으로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동은 수한면, 서는 송평리, 남은 회남면, 북은 애곡리와 접하여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자갈이 많이 있어서 내가 늘 말라 있으므로 건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건천리라 해서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가랫-재[마을] : 가래재 고개 아래 마을. 건천리 위쪽에 있다하여 ’상건천’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처음 피난민들이 화전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 공태-원[마을] : 건천리의 중심 마을. 조선시대 여행자를 위하여 원을 설치하였던 곳으로 예대원이라 하였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동쪽 1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고대원이라 불렀다.’라 기록되어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 말기의 매곡성주 공직이 살았다 하여 공태원이라고 불렀다 함. 청주~회인~보은~상주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 수리-티[마을] : 공태원 남동쪽 옛날 수리티고개 아래 있는 마을. 현재 두집만 살고 있다.
- 아낭-골[마을] : 공태원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 아낭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건천리 본 마을도 이골에 있었다고 함. 현재는 한 집만이 축산을 하며 살고 있음.
- 여내-골[마을] : 공태원 도욱쪽에 있었던 마을. 해방후 피난민들이 화전을 개간하여 살고 있었으나 화전정리시 모두 철거 되었다. 골의 산세가 아름다워 많은 남녀들이 밀회를 즐기던 곳으로 ’연애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본말은 ’이에내골’임.
마을봉사자
- 이장 이명희
- 새마을지도자 홍찬수
- 부녀회장 진대분
애곡1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부수리, 남쪽은 건천, 송평리, 북쪽은 고석 갈티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애티리와 보고곡리를 병합하여 애티와 보고곡의 이름을 따서 "애곡리"라하고 보은군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쑥-티 : 애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쑥이 무성하므로 붙어진 이름이며, 쑥을 먹은 황소가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아 황소를 사육하지 못하였다 하며 단양우씨 집성촌이다.
- 복우실 : 쑥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소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우종선
- 새마을지도자 김우경
- 부녀회장 우춘홍
애곡2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수한면, 서쪽은 부수리, 남쪽은 건천, 송평리, 북쪽은 고석 갈티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애티리와 보고곡리를 병합하여 애티와 보고곡의 이름을 따서 "애곡리"라하고 보은군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쑥-티 : 애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쑥이 무성하므로 붙어진 이름이며, 쑥을 먹은 황소가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아 황소를 사육하지 못하였다 하며 단양우씨 집성촌이다.
- 복우실 : 쑥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소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서주석
- 새마을지도자 채희동
- 부녀회장 공석
부수1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애곡리, 서쪽은 중앙리, 남쪽은 눌곡리, 북쪽은 고석리와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교동,종산리,지산리,평창리,사동,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수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깥모산(地山) : 안모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안모산(種山) : 부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큰 못의 안에 있음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 "종산이"라고도 한다.
- 바락고개(發花恃)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 바락고개에 있다.
- 숲거리 : 바깥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많았다고 한다.
- 우무실 : 향교골 남쪽에 있는 마을 소없이 농사를 지어도 과일이 많아 먹을 것이 많아서 우무실이라 한다고 한다.
- 향교골(행교말, 校洞)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회인향교(懷仁鄕校)가 있다.
전설 및 설화
아미산성
옛날 아미산 맞은편 송정봉 기슭에서 흘어머니를 모시고 낮이면 말다리기 활 쏘기로,밤이면 글 일기 글씨 쓰기로 나날을 보내던 두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이 오누이는 두이 같이 서로의 힘 자랑을 곧잘 하곤 하였다.그 어느 날엔가는 듣기에도 끔찍한 목베기 내기 힘겨름을 하기로 두 오누이는결정하였다.
오라비는 백 근이 넘는 쇠신을 신고 그곳에서 서울까지의 삼백육십리 길을 당일로 다녀오기로 하고,누이는 그동안에아미산에 석성을 쌓아놓겠다는 것이,두 오누이의 목을 건 힘겨름이었다.
이일을 안 홀어머니는 힘을 다하여 말렸으나 들어주기를 않으니 두 자식을 다 키우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딸자식을 죽이자는 결심에서 문 한쪽만 달면 끝날 딸을 꾀어
검정콩밥을 먹으라는 핑계로 일손을 멀추게 하였다.누이가 세 술째 떠넣는 그 밥이 반도 넘어가기 전에 오라비의 쇠신끄는 소리가 들려오자 누이는 태연하게 목을 내놓았다.
누이의 목에 칼을 대자 눈물을 먹음고 오라비에게 약속은 목숨보다 중하다는 격려의 말을 하며 끝내 누이는 죽고 말았다.
누이의 죽음이 어머니의 술책에서 이었음을 나중에야 안 오라비도 "옳지 못한 삶은 옮은 죽음만 못하다"하고 칼을 빼어 공중으로 던지며,
"너는 너 갈대로가라,다만 일찍이 우리 오누이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표적을 전하여 다고"하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쳐서 죽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아무리 죽으려도 죽질못하고 그저 소낙비같은 눈물만 쏟으며 미 친개처럼 돌아다니더니 끝내는 가벼운 몸이 되어 공중을 빙빙 떠다니다가
여름철엔 아미산 근처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다녔다 그리고 아들이 던진 칼은 홀로 날아 아미산에 박혀 움평다리를 만들고 칼날은 녹아서 그 앞에 냇물이 되었다고 한다.
탑사리들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흥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 홍윤성을 말한다.
횽윤성!그는 조선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싶은 대로 하고살았다는 것이고,그가 그와 같이 살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 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십 명씩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여 배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는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꺽어 그 종들을 닥치는대로 쳐서 한강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히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에 이비범한 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원 주부(지금의 훈련소의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
홍윤성은 그 강궁을 당겨 거듭 두 개를 모두 꺽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첩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갔다.
세조임금이 신하들에게 술 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 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마신다 하여 경음당 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
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레 치부한 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받았다.
그의 집앞에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과 말,수레,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라는 익살스럽운 집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경해 속으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년에 당시 회인현이었던 회인면 부수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
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453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이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 3등에 인산군에봉해졌다.
1467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 임금이 죽자 신숙주,한명회 등과 원상(다음임금이 즉위 할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
1469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70년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에 성종 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그의 처음이름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응이었다.위평리라 시호되었다.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진완
- 새마을지도자 강상덕
- 부녀회장 고춘자
부수2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애곡리, 서쪽은 중앙리, 남쪽은 눌곡리, 북쪽은 고석리와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교동,종산리,지산리,평창리,사동,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수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깥모산(地山) : 안모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안모산(種山) : 부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큰 못의 안에 있음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 "종산이"라고도 한다.
- 바락고개(發花恃)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 바락고개에 있다.
- 숲거리 : 바깥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많았다고 한다.
- 우무실 : 향교골 남쪽에 있는 마을 소없이 농사를 지어도 과일이 많아 먹을 것이 많아서 우무실이라 한다고 한다.
- 향교골(행교말, 校洞)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회인향교(懷仁鄕校)가 있다.
전설 및 설화
아미산성
옛날 아미산 맞은편 송정봉 기슭에서 흘어머니를 모시고 낮이면 말다리기 활 쏘기로,밤이면 글 일기 글씨 쓰기로 나날을 보내던 두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이 오누이는 두이 같이 서로의 힘 자랑을 곧잘 하곤 하였다.그 어느 날엔가는 듣기에도 끔찍한 목베기 내기 힘겨름을 하기로 두 오누이는결정하였다.
오라비는 백 근이 넘는 쇠신을 신고 그곳에서 서울까지의 삼백육십리 길을 당일로 다녀오기로 하고,누이는 그동안에아미산에 석성을 쌓아놓겠다는 것이,두 오누이의 목을 건 힘겨름이었다.
이일을 안 홀어머니는 힘을 다하여 말렸으나 들어주기를 않으니 두 자식을 다 키우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딸자식을 죽이자는 결심에서 문 한쪽만 달면 끝날 딸을 꾀어
검정콩밥을 먹으라는 핑계로 일손을 멀추게 하였다.누이가 세 술째 떠넣는 그 밥이 반도 넘어가기 전에 오라비의 쇠신끄는 소리가 들려오자 누이는 태연하게 목을 내놓았다.
누이의 목에 칼을 대자 눈물을 먹음고 오라비에게 약속은 목숨보다 중하다는 격려의 말을 하며 끝내 누이는 죽고 말았다.
누이의 죽음이 어머니의 술책에서 이었음을 나중에야 안 오라비도 "옳지 못한 삶은 옮은 죽음만 못하다"하고 칼을 빼어 공중으로 던지며,
"너는 너 갈대로가라,다만 일찍이 우리 오누이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표적을 전하여 다고"하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쳐서 죽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아무리 죽으려도 죽질못하고 그저 소낙비같은 눈물만 쏟으며 미 친개처럼 돌아다니더니 끝내는 가벼운 몸이 되어 공중을 빙빙 떠다니다가
여름철엔 아미산 근처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다녔다 그리고 아들이 던진 칼은 홀로 날아 아미산에 박혀 움평다리를 만들고 칼날은 녹아서 그 앞에 냇물이 되었다고 한다.
탑사리들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흥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 홍윤성을 말한다.
횽윤성!그는 조선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싶은 대로 하고살았다는 것이고,그가 그와 같이 살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 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십 명씩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여 배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는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꺽어 그 종들을 닥치는대로 쳐서 한강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히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에 이비범한 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원 주부(지금의 훈련소의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
홍윤성은 그 강궁을 당겨 거듭 두 개를 모두 꺽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첩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갔다.
세조임금이 신하들에게 술 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 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마신다 하여 경음당 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
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레 치부한 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받았다.
그의 집앞에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과 말,수레,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라는 익살스럽운 집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경해 속으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년에 당시 회인현이었던 회인면 부수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
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453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이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 3등에 인산군에봉해졌다.
1467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 임금이 죽자 신숙주,한명회 등과 원상(다음임금이 즉위 할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
1469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70년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에 성종 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그의 처음이름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응이었다.위평리라 시호되었다.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박순권
- 새마을지도자 우인제
- 부녀회장 정명자
눌곡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2㎞ 지점인 면의 남부에 위치하여 동은 애곡리와 송평리, 서는 용곡리, 남은 죽암리, 북은 중앙리와 부수리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늪실 또는 눌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평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눌곡리라 해서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가달-피[마을] : 늪실 동쪽에 있었던 마을. 구들티가 변한 것으로 영해박씨 선대의 재실과 관리인이 살았으나 현재는 재실만 있음.
- 늪-실[마을] :눌곡리의 으뜸되는 마을.
- 양지-말[마을] : 늪실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편에 있는 마을.
- 오-가리[마을] : 늪실 남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 다섯 집이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음. 현재는 풍림정사만 있음.
- 음지-말[마을] : 늪실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음지편에 있는 마을.
마을봉사자
- 이장 유화순
- 새마을지도자 박안수
- 부녀회장 주원자
송평1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인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건천리, 서는 죽암리, 남은 회남면, 북은 눌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송리와 황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자송고 황평의 이름을 따서 송평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디-울[마을] : 송평리의 으뜸되는 마을. 지형이 "옥녀직금형"의 바디에 해당된다고 함. 옛날 마을 뒷산에 주자서원이 있었고, 앞에 붉은 소나무가 있어 자송이라 불렀다고 함. 송평2리가 됨.
- 황-버리[마을] : 바디울 북쪽에 있는 마을. 송평1리
마을봉사자
- 이장 홍순보
- 새마을지도자 조해수
- 부녀회장 이공순
송평2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인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건천리, 서는 죽암리, 남은 회남면, 북은 눌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송리와 황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자송고 황평의 이름을 따서 송평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바디-울[마을] : 송평리의 으뜸되는 마을. 지형이 "옥녀직금형"의 바디에 해당된다고 함. 옛날 마을 뒷산에 주자서원이 있었고, 앞에 붉은 소나무가 있어 자송이라 불렀다고 함. 송평2리가 됨.
- 황-버리[마을] : 바디울 북쪽에 있는 마을. 송평1리
마을봉사자
- 이장 윤찬호
- 새마을지도자 양웅석
- 부녀회장 이재열
죽암1리
위치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송평리, 서쪽은 용곡리, 남쪽은 신대리와 회남면, 북쪽은 눌곡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면의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회인홍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회인현에는 이,홍, 장, 신, 최씨등이 대대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이 마을에 홍씨만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자연마을
- 죽바우 : 죽암리 중심 마을로 마을앞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자우또는 죽바우라 하였다.
- 새터 : 죽바우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유만형
- 새마을지도자 홍익표
- 부녀회장 김숙환
죽암2리
위치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송평리, 서쪽은 용곡리, 남쪽은 신대리와 회남면, 북쪽은 눌곡리와 접해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면의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회인홍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회인현에는 이,홍, 장, 신, 최씨등이 대대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이 마을에 홍씨만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자연마을
- 죽바우 : 죽암리 중심 마을로 마을앞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자우또는 죽바우라 하였다.
- 새터 : 죽바우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양지쪽에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양하석
- 새마을지도자 이필수
- 부녀회장 우숙이
신대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3㎞ 지점으로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회남면, 서는 용곡리, 북은 죽암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해서 새터 또는 신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라 하고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 수몰되었고, 마을을 저지대에서 새로 개설된 도로 아래로 이전하였다.
자연마을
새-터[마을] : 신대리 마을. 처음에는 회인천 건너에 있는 죽암2리와 합쳐
마을봉사자
- 이장 양희천
- 새마을지도자 김홍은
- 부녀회장 정화영
용곡1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강병설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황인자
용곡2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동섭
- 새마을지도자 조성호
- 부녀회장 -
용곡3리
위치
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눌곡·죽암·신대리, 서쪽은 청원군, 남쪽은 회남면, 북쪽은 중앙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곡·용두·가정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두와 명곡의 이름을 따서 "용곡리"라 하여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용머리(龍頭) : 쇠푼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 쇠푼이 : 용곡리의 으뜸마을로 절 밑 산에서 쇠가 나왔다고 한다.
- 우레 : 쇠푼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뒤산에서 "두견새"가 울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계환
- 새마을지도자 -
- 부녀회장 -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회인면 총무팀
- 전화번호 043)540-4271~75
- 최종수정일 202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