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소개
군민이 행복한 도시형 농촌 보은입니다.장안1리
위치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봉비리, 북서는 구인리, 남쪽은 황곡리에 위치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장마 안쪽이 되므로 장안 또는 장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라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유래
고증자료는 없으나 서기 850년전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을 예언했던 도승이 장안을 지나다 들어와 장안뒤 산 형세를 보고 속리산 천황봉의 줄기를 따라 장안마을 뒷산 형태가 옥황상제가 장막을 치고 옥좌에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해서 예부터 마을 이름을 한자로 장막장(帳) 편안할 안(安)자를 써서 장안이라고 줄곳 불리워왔다. 그뒤로 라는 동요가 전해오기도 한다. ※ 장안 뒷산을 한자로 풀이하면 형태가 수풀림(林)자로 생겼다고 해서 장안에 임씨 성씨가 살면 장안 부자로 이름이 난다고 전해오기도 함.
자연마을
- 장안 : 장내리 중심 마을로 동학교도 취회시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라는 민요가 있었다 한다.
- 장터 : 장안 서쪽 국도와 관광도로 분기점에 새로 생긴 마을. 전에 장이 섰던 곳이다.
- 새터 : 장안 북쪽에 새로된 마을
특징
수도작을 위주로 하는 농촌마을로 동학운동의 단초가 된 유적지가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병남
- 새마을지도자 이상영
- 부녀회장 이미숙
장안2리
위치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봉비리, 북서는 구인리, 남쪽은 황곡리에 위치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장마 안쪽이 되므로 장안 또는 장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라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유래
고증자료는 없으나 서기 850년전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을 예언했던 도승이 장안을 지나다 들어와 장안뒤 산 형세를 보고 속리산 천황봉의 줄기를 따라 장안마을 뒷산 형태가 옥황상제가 장막을 치고 옥좌에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해서 예부터 마을 이름을 한자로 장막장(帳) 편안할 안(安)자를 써서 장안이라고 줄곳 불리워왔다. 그뒤로 라는 동요가 전해오기도 한다. ※ 장안 뒷산을 한자로 풀이하면 형태가 수풀림(林)자로 생겼다고 해서 장안에 임씨 성씨가 살면 장안 부자로 이름이 난다고 전해오기도 함.
자연마을
- 장안 : 장안리 중심 마을로 동학교도 취회시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라는 민요가 있었다 한다.
- 장터 : 장안 서쪽 국도와 관광도로 분기점에 새로 생긴 마을. 전에 장이 섰던 곳이다.
- 새터 : 장안 북쪽에 새로된 마을
특징
수도작을 위주로 하는 농촌마을로 동학운동의 단초가 된 유적지가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윤동근
- 새마을지도자 문봉철
- 부녀회장 정옥자
서원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속리산면, 서는 장재·장안리, 남은 개안·봉비리와 마로면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 상현서원이 있어 서원말 또는 서원라 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돌리를 병합하여 서원리라 하고 "속리면 소재지"가 되었다가 그 뒤 장내리로 옮겨 갔으며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서원-말 : 서원리 으뜸되는 마을 상현서원이 있다.
- 황해동 : 안돌이 서북쪽에 있는 마을 해가 질 때 황금같이 누런 햇빛이 비친다고 한다.
- 안돌이 : 서원말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험하여 바위를 안고 돌게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 352호인 서원리 소나무가 있다.
특징
지방기념물 제43호인 상현서원과 천연기념물 352호인 정부인 소나무 가 있으며 심산유곡과 기암괴석을 자랑하는 여름철 관광명소인 서원 계곡이 있음. 또한 수강생450명을 수용할수 있는 제일고시학원이 위치해 있음
마을봉사자
- 이장 김병수
- 새마을지도자 한덕우
- 부녀회장 전재숙
개안리
위치
면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은 봉비리, 서는 장안리·황곡리, 북은 서원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개안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개안, 또는 하개안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점말을 병합하여 "개안리"라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개안 : 삼가천이 이 지점에 이르러 양갈래로 분류되어 흐르고 장안밑에서 갈라졌다고 하여 하개안 또는 개안이라고 부른다.
- 점말 : 등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특징
마을안에 2201부대3대대가 위치해 있으며 문화재로는 중요민속자료 제134호인 선씨가옥이 있어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관광명소로서의 가치가 높음
마을봉사자
- 이장 선진규
- 새마을지도자 정세영
- 부녀회장 이춘자
황곡리
위치
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장안리·개안리, 서쪽은 구인리, 남쪽은 탄부면, 북쪽은 장내리와 접하고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거치실 또는 황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곡리"라 하였으며,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거치실 : 옛날에 봉황새가 살던 곳이라 하여 황곡이라 하였고 앞뜰에 매년 풍년이 든다하여 황곡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보은에서 상주를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을이라 하여 거치실이라 불렀는데 거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오늘의 지명으로 변했다 한다.
특징
수도작위주의 전형적인 농촌마을
전설 및 설화
마을봉사자
- 이장 윤윤용
- 새마을지도자 조민형
- 부녀회장 이인순
봉비리
위치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동은 불목리,서는 개안리,남은 탄부면,북은 서원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새비랭이 또는 봉비리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비리라고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새비랭이 : 봉비리 중심마을 옛날 마을 뒷산인 구병산 줄기에 나무가 무성하고, 들에는 잡초가무성하여 철새들이 모여 살았고, 오리미숲에는 봉황이 살고 있어 아침이면 날아서 앞 마을 황곡리 빙경산에서 놀고, 밤이면 오리미숲으로 날아 온다고 해서 새비랭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마을 뒤 꼴미산이 봉황이 나는 형국이라 해서 새비랭이라고 했고, 새가 날아가면 마을에 좋지 않다고 해서 마을앞에 봉황이 깃들 수 있게 오리미를 만들었다고 한다
- 오리미 : 새비랭이 서쪽에 있는 마을 꼴미산의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오동나무 숲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특징
농업위주의 농촌마을로 11개리중 가장 인구가 많고 사과, 배등 과수농가가 많이 있음
우진플라임 기업이 입주해 있음
전설 및 설화
진사래 보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뒤에 영의정을 지낸 김자점은 면장 임경업 장군을 죽인 반역자다.
그러나 황해도 지방에 가면 그의 덕을 기리는 비가 이곳저곳에 적지 않게 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수리시설인 보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잘 만든 사람으로 꼽힌다.
"자점이 보 막듯 하여라"는 속담이 칠전팔기하라는 뜻으로 이야기 되리만큼 그의 보막이 사업은 대단한 집념이 있었던 것이고 자연과 각박하게 대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자연과 대결하여 자연과 싸워 그 자연을 굴복시켜 사람축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어는 누구보다 훌륭한 것이다.
역사에서 반역자로 처형된 김자점이지만 황해도에 와서 수리시설인 보를 여기저기에 만든 김자점이 황해도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현재 장안면 개안리와 봉비리 앞들에 관개에 큰몫을 하는"진사래"도 한 인간의 의지의 승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장안면 봉비리에 정가묵이라는 이가 살았다.
그의 호는 낭간으로 일찍 성균진사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독서와 산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마을앞 수만평이나 되는 토지가 황무지로 되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으나 그 부근의 전답들도"달밤에도 가뭄이 탄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수리시설이 말이 아니었다.
원래 공익심이 남다른 데가 있던 그는 지방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 앞을 흐르는 삼가천냇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할 것을 마음먹었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에 흘러가는 삼가천은 지금은 속리산면 삼가리에 큰저수지를 막아 유수한 수리시설을 갖춘 냇물이었지만 그때는 이곳 장안면 개안리에 이르면 냇물은 모두 자갈 속에 스며들어 장마때가 아니면 좀처럼 물구경 하기가 어려운 때라 이곳에 보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으로 알던 때였다.
이것을 잘 아는 정진사는 이곳에서 약 십리가량 상류로 올라가 장안면 서원리 북두무니라는 냇물 웅덩이에서부터 냇물 바닥을 파서 하류로 물길을 잡아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정진사는 동민과 하인들을 독려하여 냇물바닥을 파서 새로운 물길도 찾아가면서 계속해 하류로 파 내려왔다. 그리하여 개안리 마을을 아래에 이르러 돌로 제방을 쌓아 보는 완성하니 엄청난 양의 물이 모였고 이 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전답으로 개간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마을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가난한 빈촌에서 부촌으로 탈바꿈해 가니 비로소 정진사의 공덕이 크다고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진사에 보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중에 사투리로 변하여"진사래보"로 변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재영
- 새마을지도자 김동배
- 부녀회장 홍성녀
불목리
위치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남은 마로면, 서북은 봉비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불모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불목리라 하였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불목-골 : 마로면 시루산에 떡시루를 걸어놓고 방화실에서 불을 붙여 불이 잘 타는가를 들여다 보는 형국이라하여 불목이라고 정감록 비결파들이 지은 이름이라 한다.
특징
농업위주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11개리중 교통이 가장 불편한 곳으로 버스가 운행되지 않고 있음
마로면과 인접해 있어 학교 및 시장권을 주로 관기리로 이용하고 있음
전설 및 설화
마을봉사자
- 이장 이동우
- 새마을지도자 임성우
- 부녀회장 양근순
오창1리
위치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자재리, 그리고 보은읍에 둘러 싸여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심리,사창리,오송리를 병합하여 오심과 사창의 이름을 따서 오창리라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새창이 마을 : 장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세조께서 속리산에 가실 때 대궐터에서 야식을 하시는데 세조를 모시는 병정들이 이곳에 묵어서 세창이로 변했음.
- 암소바우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모롱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암소 발자국과 같은 자국이 있다 함.- 오심불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오심불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장자불(장자촌, 장자울) : 오심이 남쪽에 있는 현재는 오창2리가 된다. 옛날 표씨가 독점 마을에서 독을 구어 생활할때 표씨의 큰 아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함.
- 목장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1950년대 정부지원으로 목장을 만들었던 곳이다.
특징
농업위주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지역특산품 매장인 운봉서각이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기학
- 새마을지도자 정민재
- 부녀회장 신경숙
오창2리
위치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자재리, 그리고 보은읍에 둘러 싸여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심리,사창리,오송리를 병합하여 오심과 사창의 이름을 따서 오창리라 하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새창이 마을 : 장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세조께서 속리산에 가실 때 대궐터에서 야식을 하시는데 세조를 모시는 병정들이 이곳에 묵어서 세창이로 변했음.
- 암소바우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모롱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암소 발자국과 같은 자국이 있다 함.- 오심불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오심불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장자불(장자촌, 장자울) : 오심이 남쪽에 있는 현재는 오창2리가 된다. 옛날 표씨가 독점 마을에서 독을 구어 생활할때 표씨의 큰 아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함.
- 목장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1950년대 정부지원으로 목장을 만들었던 곳이다.
특징
농업위주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지역특산품 매장인 운봉서각이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남희
- 새마을지도자 김병후
- 부녀회장 최순봉
장재리
위치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서원리·속리산면, 서쪽은 오창리, 남쪽은 구인·장안리, 북쪽은 속리산면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 표장자가 살았으므로 장자불 또는 장자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 장재리라 하였고,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독점 : 옛날 표씨가 독을 구으며 살았다는 장재리 중심마을
- 대궐-터 : 장자불 서북쪽에 있는 마을 세종대왕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속리산에오실 때 이 곳에 임시로 대궐을 짓고 머물렀다고한다.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모두 한옥으로 지었기 때문에 한옥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특징
농업을 주로하며 외국인 홍보용으로 조성된 한옥마을(대궐터)이 있으며 수리시설로 장재저수지가 있음
전설 및 설화
속리산 말티고개
보은을 지나 속리산으로 오면 해발 800m의 꼬불꼬불한 12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개를 말티고개라고 한다.
속리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닦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대왕께서 올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1966년 도로포장 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는 박성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장안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수 없어 말로 바꾸어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속리산면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으로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구름처럼 사라진 노승
세조의 행렬이 보은읍을 거쳐 대야리 앞을 지나 속리쪽으로 나즈막한 고개를 막 올라 섰을 때였다.행렬 앞에 한 늙은 중이 나타나 세조대왕앞에 합장제례를 드린 후"대왕마마!이 고개넘어 오봉산이 있사온데 이산 아래에 행궁을 지으시고 오고 가실 때 쉬어가소서"하고는 구름처럼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신기하여 노승이 말한대로 행궁을 짓게 하고 행궁앞산에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도록 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노승이 나타났던 고개를 미륵불이 변신하여 나타난곳이라 하여 ’미륵댕이 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오봉산 아래 행궁을 지었던 자리를 ’대궐터’그리고 북을 달았던 곳을"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미륵댕이는 현재 통일탑이 서 있는 곳에서 속리산쪽으로 가는 작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대궐터란 장재저수지 아래 현재 한옥집단 취락구조 마을 이름이다.
효자 이야기
옛날 독점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근 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는데도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경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 곁에서 뜬 눈으로 병구환을 하던 아들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는데,꿈에 신령이 나타나 내일 아침"말티고개 밑에 가면 한 중이 지나갈 걸이니,그를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사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그가 말티고개 밑에 이르니 바랑을 짊어지고 막 고개를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효자는 그 중의 팔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중은 그의 청을 들은 척도 않고 손을 뿌리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였다.
이때 어떻게 세게 중의 팔을 잡았는지 중의 팔이 떨어지게 되었다.
팔이 떨어진 중은 허우적 거리면 고개를 오르다 지쳤는지 짊어지고 있는 바랑을 벗어 던지고는 피을 흘리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효자는 한 동안 넋을 잃고 중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잡고 있던 중의 팔을 내려다 보니 그것은 사람의 팔이 아니라 산삼이었다.
기쁜 나머지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그 산삼을 달여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그후 중이 바랑을 벗어 놓은 골짜기를 [바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철환
- 새마을지도자 김상훈
- 부녀회장
구인리
위치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동은 서원리,서쪽은 장재리,남은 황곡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사각면의 지역으로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으므로 귀신다리라 하였는데 보은 원님의 처가가 이곳에 있어서 원님이 항상 찾아오므로 귀인다리 또는 求仁이라 하였으며,1914년 행정구역 폐함에 따라 대목,방아다리,쇄실을 병합하여 구인리라 해서 탄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장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구인(귀신다리,귀인다리) : 옛날 귀신교 또는 지렁이 들이라고 부르는 곳이다,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이성만,은만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당시 보은 현감으로 있던 이번이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와 함께 이마을에 들려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이름이 귀신다리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영의정 이여가 "효제는 어젠 것이 근본이다"라고 말하며,마을 이름을 구인교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구인리라고 하였다.
- 방아다리 : 구인 서남쪽에 있는 마을 뒷산등성이가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겼다하며 작은 도랑을 건너서 집으로 들어가는 곳에 디딜방아를 걸쳐 놓고 다녔기 때문에 "방아다리"라고도 한다.
- 대목이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큰 나무가 많았다 한다.
- 쇄실: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 예안 이씨 재실이 잇는 곳으로 재실이 변한 말로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 하여 송곡이라고도 한다.
특징
농업을 주로하며 장안농공단지가 위치해 있으며 13개업체가 입주해 있음
마을봉사자
- 이장 이준권
- 새마을지도자 이헌규
- 부녀회장 여숙자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장안면 총무팀
- 전화번호 043)540-4091 ~ 95
- 최종수정일 2024.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