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판리
위치
면 소재지 마을로 면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도화리, 서는 중판리, 남은 갈목리, 북은 사내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위쪽이 되므로 웃늘근이 또는 상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방바우, 진대, 조항, 생왕동, 칠송정을 병합하여 상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고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자연마을
- 새목이 : 정이품송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 한다.
- 새양골 :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에는 골짜기에 이무기가 살았는데 몇 년의 기도 끝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이 없어지고 속리산 유스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 웃늘근이 : 상판리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장터 : 지방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장이 섰던 곳으로 면사무소 앞 마을이다.
- 지방바우 : 상판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바위가 무지방 같이 생겼다고 한다. 문턱바위라고도 하며 속리중학교와 농협이 있다.
- 진터 : 장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이품송 남서쪽에 있다.
- 칠송정 : 장터 서쪽 법주초등학교가 있는 마을로 칠송정 나무가 있었다.
전설 및 설화
정이품송
말티재를 넘은 세조의 일행이 속리산면 상판리에 당도하니 길가에 우산 모양을 한 큰 소나무가 한그루 우뚝 서있었다. 세조는 소나무 아래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떠나려고 연을 타고 보니 늘어진 가지에 연이 걸릴 것 같았다."연 걸린다."세조는 연을 멘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졋다. 축 늘어져 있던 소나무가지 하나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또한 이 소나무는 세조가 피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이 소나무 아래 이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왔고 세조 일행은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 할수 있었다 .세조는 "올 때 신기하게 나를 무사히 지나도록 하더니 이제 갈 때는 기특하게도 비를 막아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하면서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이 소나무를 "연거랑이소나무" 혹은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수끼리 맺어진 부부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천영기념물인 정이품송이 서있는 부근마을을 "진터"라부르고 그 마을에서 동쪽으로 들어간 산골짜기를 "가마골"이라 부른다.
조선 제7대 임금이신 세조대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롭고 영리하여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그런데 세조가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딸은 몹시 안타깝게 여기면서 눈물을 흘리면 간하였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참으로 방정스럽고 괴이한 계집애다. 당장 끌어내어 사약을 먹여라."
이리하여 공주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왕비 윤씨가 이 소리를 듣고 자식을 사랑하는 모정에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몆번이나 남편에게 매달려 살려 달라고 하엿으나 세조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한 윤씨는 마침내 금은 패물을 한 보퉁이 싸서 유모에게 맡기고 어디든지 공주를 모시고 가서 숨어 살 것을 부탁하였다.
공주와 유모는 남복으로 변장을 한 후 눈물을 뿌리며 대궐을 빠져 나왔으나 구중궁궐깊은 속에서 살던 그들에게 세상이 넓다한들 어디로 가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발길 닿는대로 온 곳이 보은땅이었다. 지친김에 쉬어가려 땅에 주저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그때 나무꾼 한 사람이 나무를 한짐 지고 오더니 짐을 받쳐들고 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나무꾼에 쏠렸다. 이제 한 십칠팔세 가량 되어 보이는 준수하게 생긴 총각이었다. 나무꾼도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어디를 가시는 나그네이시온지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약간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물었다.
나무꾼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고 또 여기서 인가가 있는 곳을 가려면 한참 걸어야 하니 저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같이 가시는게 어떠시겠습니다."하고 물었다.두 사람은 총각의 뒤를 따라가 깊은 산중 숲속 바위 밑에 자리잡은 움집을 안내되었다.
깊숙한 산중에 외딴집에서 가족도 없이 총각 혼자살고 있는 것이 겁도 나고 의심도 적지 않았으나 워낙 총각이 공손하고 다정스러워 그날 밤 총각이 지어다 주는 밥을 먹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으나 피로가 겹친 공주가 병이 나자 그들은 떠나지 못하고 그 움집에서 며칠을 더 묵게 되었고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두 나그네가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모는 총각을 불러놓고"우리들은 본시 서울 대갓집 아녀자들이온데 큰 화를 당해 변장하고 숨어다니는 중이옵니다.이제 다행히 당신같이 좋은 주인을 만나 토설하는 터이오니 제발 숨겨주시어 목숨만 갈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목 메인 소리로 호소를 하였더니 총각의 얼굴색이 순간 달라지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며 자기도 역시 화를 피하여 이곳에 살고 있는 길이라 하여 어차피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그들은 한솥에 밥을 먹고 한 방에서 기거를 하게 되어 부지중에 젊은 두남녀는 정이 들게 되었고 이성간에 무사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을 가려서 맑은 냉수를 떠놓고 성례를 하여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되자 총각이 먼저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느 댁 따님이시오? 우리 기왕 한 몸이 되었으니 숨길 것이 무엇이겠소.?
그리하여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였다. 한숨과 눈물 속에 이야기를 다 듣고난 신랑은 갑자기 일어난 공주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목메인 소리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처음부터 귀인이신 줄은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발로 절재 김종서 대감의 둘째 손자올시다 집안이 온통 망하고 가족이 모두 살해될 때 하인의 친절한 주선으로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주와 유모는 깜짝놀랐다. 그리고 형용 못할 야릇한 감정이 솟아 올랐다.원수끼리 맺어진 신랑 신부, 그러나 젊은 그들은 한껏 정답고 단란하기만 했다. 실로 꿈같은 현실 속에서 꿈같이 세월이 흘러갔다. 몇 년이 흐르자 이들은 귀여운 아들 딸을 낳았고 차츰 경계가 누그러지자 값진 보물을 팔아 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집과 땅도 사고 그리고 뒷산 골짜기에 숯굽는 가마를 만든 후 숯을 구어 보은 읍내에 나가 팔기도 하여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이 무렵 피부병이 든 세조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데 마침 속리산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는 집은 속리산 초입 길목인 정이품송 근처 마을에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공주내외는 그때 여섯 살난 아들과 네 살짜리 딸에게 꼼짝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으나 세조가 그 마을 앞 큰소나무 아래 행차를 머물게 하고 쉬자,동네 아이들은 웬 구경꺼리냐고 일제히 내달아 와서 구경을 하게되자 이들의 어린 두 남매도 부모님의 타이름이 있었으나 어린 호기심에 그만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세조가 무심히 아들을 내려보다가 맨앞에 서 있는 어린 두남매를 발견하였고 생김생김이며 차림차림이 다른 아이들과 휠씬 돋보이는데다 모습이 어쩌면 옛날에 죽었던 자기 딸의 얼굴과 흡사했다.
세조는 측근신하를 불러 저 아이들의 집을 알아 보도록 지시한 후 그곳을 떠났고 지시를 받은 신하는 두 남매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세조는 평복을 하고 두명의 신하만 거느리고 이 집 앞에 당도하여 물을 얻어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하 한사람이 물 한 그릇을 청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문틈을 밖을 내다본즉 부와마마가 문앞에 서 있는지라 깜짝 놀라 뒷문을 통하여 숯을 굽고 있는 남편을 찾아사 이 사실을 알리고 아이들과 함께 산을 넘어 도망을 가고 말았다.
대신이 조금전까지 인기척이 있었는데 아무리 물을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으므로 의심이 더럭 나서 문을 열어보니 뒷문이 열려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이는 분명한 역적의 무리라 생각하고 세조를 급히 모시고 돌아간 후 군사를 이끌고 마을에 진을 친뒤, 군사를 풀어 아무리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고 세조는 자신의 딸이 숨어 살고 있음을 알고 천륜의 정이 쏠리었으나 차마 발설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뒤부터 군사사 진을 친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진터"라고 불렀고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 하여"가마골"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나기선
-
새마을지도자
안춘석
-
부녀회장
김동기
갈목리
위치
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삼가리,서와 남은 장안면,북은 중판,상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갈목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갈목 하갈목을 병합하여 갈목리라 하였으며 1947년에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갈목 : 전에 이곳에 칡덩굴이 많아 갈목리라 하였다고 하며 길이 갈라지는 목에 있어 갈목리라 하였다고도 한다.
전설 및 설화
희너미 유래
말티에서 장안면 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속리절 중과 구병절 중이 이 고개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허행하고 되돌아 갔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조대희
-
새마을지도자
김상정
-
부녀회장
김선옥
중판1리
위치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상판리 서는 보은읍 남은 갈목리 북은 하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너더리 중간이 되므로 중간늘근이 또는 중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점촌,신기,내기,평촌을 병합하여 중판리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점말:중간늘근이 동쪽에 있는 마을 전에 이 곳에서 사기와 옹기를 구웠다고 한다.
- 새터말:벌말 동남쪽에 새로된 마을로 웃말이라고도 한다.
- 안터골:새토말 서쪽에 있는 마을
- 벌말:안터골 북쪽 벌판에 있는 마을.아랫말이라고도 한다.
- 신설동:1980년 수해로 새로 생긴 마을
전설 및 설화
황새봉 유래
벌말 동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황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챙이 유래
벌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뱀같이 생겼으며 백로가 뱀을 쪼아먹는 형상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응만
-
새마을지도자
김응주
-
부녀회장
임창숙
중판2리
위치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상판리 서는 보은읍 남은 갈목리 북은 하판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너더리 중간이 되므로 중간늘근이 또는 중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점촌,신기,내기,평촌을 병합하여 중판리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딸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문화마을
전설 및 설화
황새봉 유래
벌말 동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황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챙이 유래
벌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뱀같이 생겼으며 백로가 뱀을 쪼아먹는 형상이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박창수
-
새마을지도자
김종권
-
부녀회장
우정수
하판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 7km 지점인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사내리 서는 보은읍 남은 중판리 북은 북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늘근이 또는 하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철령을 병합하여 하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늙은이 : 상판리와 중판리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 다래나무 밀림을 노인이 들어와 개척했다고 한다. 현재는 하판리 마을
마을봉사자
북암1리
위치
면소재지로부터 서북쪽 10km지점인 면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사내리, 서는 보은읍, 남은 하판리, 북은 백현리와 산외면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바우 또는 종암, 북암이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부내실 : 세강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부자가 천석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북암 2리의 으뜸되는 마을이다.
- 부수골 : 농바우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북바우 : 북암의 또다른 이름으로 북처럼 생겼다고 한다.
- 세강터 : 부내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세갈래로 흐르는 내가 있다. 북암 1리의 중심되는 마을
- 소리목 : 부수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소리목 고개 아래에 있다.
- 텃골 : 세강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수명이 무수하게 길다하여 무수목 이라고도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심길
-
새마을지도자
황의성
-
부녀회장
방솔휘
북암2리
위치
면소재지로부터 서북쪽 10km지점인 면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사내리, 서는 보은읍, 남은 하판리, 북은 백현리와 산외면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바우 또는 종암, 북암이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부내실 : 세강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부자가 천석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북암 2리의 으뜸되는 마을이다.
- 부수골 : 농바우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북바우 : 북암의 또다른 이름으로 북처럼 생겼다고 한다.
- 세강터 : 부내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세갈래로 흐르는 내가 있다. 북암 1리의 중심되는 마을
- 소리목 : 부수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소리목 고개 아래에 있다.
- 텃골 : 세강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수명이 무수하게 길다하여 무수목 이라고도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황선봉
-
새마을지도자
김민호
-
부녀회장
이관순
백현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12km 지점으로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북암리, 서와 북은 산외면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성재 밑이 되므로 잣고개 또는 백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외면의 장갑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현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잣고개 : 조선 숙종때 이 마을에 살던 효자로 이름높던 나중경이 앞산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커서 나무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게 자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잣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봉사자
사내1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전설 및 설화
입석대와 경업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에서 동부강으로 약5.5㎞지점, 해발 1000m되는 산정에 입석이 있는데 둘레와 높이가 커서 수백명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로서 사실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고 볼 수 없으나 입석 밑에는 철편이 깔려 있어 이를 보면 사람들이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이 왕녀’덕만과 왕자 법승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는 입석대 좌측 아래쪽에 있으니 조선 인조(1594~1646)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아해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이 장군수는 불로장생하는 약수 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수정봉 거북바위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 그림자가 비치었다. 이상히 여긴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명산에 큰 거북의 물형이 당나라를 향하여 많은 당나라 재보를 동국으로 들어가려 함이니사람을 보내어 동국 방방곡곡을 탐색하여 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돌을 발견하고 돌거북의 목을 자르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한다. 그리하여 목은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거북이가 되고 말았다.
걸방바위
이 바위는 옛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모집할때 강원도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설악산 경치에 매료되어 산새를 구경하다가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구성하는 데 참여를 못하고 설악산에 머물렀다 하듯이 속리산의 걸방바위도 금강산을 가는 도중에 현재의 위치에 와 쉬면서 속리산 경치를 구경하다가 늦어서 속리산에 머무르게 되었다한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이조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7년 간 수도를 할때 큰암석을 걸방으로 져서 놓았다 해서 걸방바위라 칭하는데 그 바위에는 걸방끈 자국이 나타나 있다.
목욕소
속리산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우 양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고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수"라 부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할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특히 북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와 신미.학열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세조는 법회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 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으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소생은 월태자올시다. 약사여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 보니 그렇게도 흉칙하던 종기가 깨끗이 없어졌다는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목욕소"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문장대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라고 자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 올라가는 곳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중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어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반석 위에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보니 오륜과 삼강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봉을 문장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산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봉이라 해서 운장대 라고 불리기도 한다.
배석대
608년과 공주 덕만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로봉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빗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대사가 깜짝 놀란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사방팔방으로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 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비로봉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추래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수정봉의 산신이 산봉우리를 정리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변경하였는지라 괘심하게 생각하여"너는 이 수정보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다"하고 산봉우리 밑으로 굴러 버렸는데 그 바위가 현재 위치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하늘나라의 궁전에서 정원사가 돌사이에 낙엽이 쌓여있므로 그 낙엽을 걷어내고 바위를 옮겨 놓다가 실수를 하여 지구상에 떨어지게 되었고 정원사는 기왕에 떨어질 바에야 명산인 속리산에 떨어지도록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떨어져 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지영
-
새마을지도자
편완구
-
부녀회장
황인숙
사내2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승원
-
새마을지도자
김영완
-
부녀회장
현영주
사내3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마을봉사자
-
이장
권오덕
-
새마을지도자
민상기
-
부녀회장
정규진
사내4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전설 및 설화
입석대와 경업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에서 동부강으로 약5.5㎞지점, 해발 1000m되는 산정에 입석이 있는데 둘래와 높이가 커서 수백명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로서 사실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고 볼 수 없으나 입석 밑에는 철편이 깔려 있어 이를 보면 사람들이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이 왕녀’덕만과 왕자 법승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는 입석대 좌측 아래쪽에 있으니 조선 인조(1594~1646)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아해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이 장군수는 불로장생하는 약수 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마을봉사자
-
이장
박남식
-
새마을지도자
최상진
-
부녀회장
정창예
사내5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전설 및 설화
입석대와 경업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에서 동부강으로 약5.5㎞지점, 해발 1000m되는 산정에 입석이 있는데 둘래와 높이가 커서 수백명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로서 사실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고 볼 수 없으나 입석 밑에는 철편이 깔려 있어 이를 보면 사람들이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이 왕녀’덕만과 왕자 법승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는 입석대 좌측 아래쪽에 있으니 조선 인조(1594~1646)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아해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이 장군수는 불로장생하는 약수 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마을봉사자
-
이장
김선숙
-
새마을지도자
강인식
-
부녀회장
김선숙
사내6리
위치
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상주군,서는 북암 하판리,남은 상판 도화리에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법주사가 있으므로 사내골 사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 민판동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부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민판골 : 사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조선 초기 황참찬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판서가 머물고 묻힌 곳이라 한다.
- 청주나들 : 새내골 동남족에 있는 마을 조선시절 이곳에서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한다.
- 새내골 : 사내리의 중심마을
- 수정동 : 최근에 생긴 마을로 부락앞에 수정봉이 있다 하여 수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 부민동 : 수정동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영세하여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전설 및 설화
입석대와 경업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에서 동부강으로 약5.5㎞지점, 해발 1000m되는 산정에 입석이 있는데 둘래와 높이가 커서 수백명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로서 사실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고 볼 수 없으나 입석 밑에는 철편이 깔려 있어 이를 보면 사람들이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이 왕녀’덕만과 왕자 법승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는 입석대 좌측 아래쪽에 있으니 조선 인조(1594~1646)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아해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이 장군수는 불로장생하는 약수 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태겸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최은정
삼가1리
위치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상주군, 서는 갈목리, 남은 구병리, 북은 도화·만수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보은과 경북.문경으로 통하는 세갈래 길이 있으므로 삼가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불목리 가항 죽전리 병합하여 삼가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이 마을은 이화동이란 옛 이름이 있는데 명장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수련할때 이마을 뒷산인 형제봉에서 오얏꽃이 핀 마을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화동이라고 불렀다 한다.금강상류인 냇물이 속리산 구비마다 발원하니 천황봉 인자함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대목천과 묘막천,그리고 산주군 화북면에서 발원한 동관천이 발원지에서 모두 10여리 지점인 이 마을앞에서 합쳐흐르고 냇물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장관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자연마을
- 밤바위골:삼가리 북쪽에 있는 마을.6.25이후 난민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바위가 밤같이 둥굴둥굴한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거리:옛날 이화동 마을 세줄기 냇물이 합수된 마을이라 하여 삼계촌이라 불리가도 하였으나 삼가저수지 담수로 마을터는수몰되고, 현재 마을은 이전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 대밭말:삼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조리 대나무가 많았다 한다.
- 아래멍어모기:대밭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 지역 지형이 소로 볼때 멍에에 해당되고 형성되고 그 아래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박종웅
-
새마을지도자
박정수
-
부녀회장
허영자
삼가2리
위치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상주시, 서는 갈목리, 남은 구병리, 북은 도화·만수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보은과 경북.문경으로 통하는 세갈래 길이 있으므로 삼가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불목리 가항 죽전리 병합하여 삼가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이 마을은 이화동이란 옛 이름이 있는데 명장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수련할때 이마을 뒷산인 형제봉에서 오얏꽃이 핀 마을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화동아라고 불렀다 한다.금강상류인 냇물이 속리산 구비마다 발원하니 천황봉 인자함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대목천과 묘막천,그리고 산주군 화북면에서 발원한 동관천이 발원지에서 모드 10여리 지점인 이 마을앞에서 합쳐흐르고 냇물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장관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자연마을
- 밤바위골:삼가리 북쪽에 있는 마을.6.25이후 난민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바위가 밤같이 둥굴둥굴한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거리:옛날 이화동 마을 세줄기 냇물이 합수된 마을이라 하여 삼계촌이라 불리가도 하였으나 삼가저수지 담수로 마을터는수몰되고, 현재 마을은 이전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 대밭말:삼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조리 대나무가 많았다 한다.
- 아래멍어모기:대밭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 지역 지형이 소로 볼때 멍에에 해당되고 형성되고 그 아래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재은
-
새마을지도자
어현우
-
부녀회장
윤순태
구병리
위치
면의 동남쪽 끝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상주군, 서북은 삼가리, 남은 마로면과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윗명어목이, 느진목이, 된목이를 합하여 구병산 밑이 되므로 구병리라 하였으며 1974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구렁말 : 윗멍어목이 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 느진목이 : 윗멍어목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 밑에서 쳐저 떨어져 있다.
- 돌목이 : 느진목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 밑에 바짝 붙어 있어 된목이라고도 부른다. 돌이 많다.
- 윗멍어목이 : 구병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고 하고 석항과 합하여 보은 8항의 하나라 한다.
마을봉사자
-
이장
박희정
-
새마을지도자
김경환
-
부녀회장
양선옥
도화리
위치
면 소재지로부터 12km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만수리, 서는 상판리, 남은 삼가리, 북은 사내리와 접하고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큰 목 밑이 되므로 대목골 또는 대목, 대목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웃대목과 아래대목을 병합하여 도화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
- 도화리 : 원래는 봄철에 복숭아 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어서 임경업 장군이 무예를 닦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다가 도화동이라 불러 처음에는 도화동이라 불렸다. 일설에는 지형이 복숭아 같아 도화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화목하게 산다하여 대목동이라고 바꾸어 불리다가 한일합병후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어 도화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 아래대목골 : 도화리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 웃 대목골 : 도화리의 윗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정근
-
새마을지도자
윤병철
-
부녀회장
신미경
만수리
위치
면의 동쪽에 위치 있으며 동북은 경북 상주군, 서는 도화·삼가리, 남은 삼가리와 경북상주군에 접해 있다.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으로서 풍천임씨들의 묘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수동 피앗재 묵밧추리 냉골을 병합하여 묘막라라 하고.1947년 속리면 분할됨에 따라 속리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군조례에의거 묘막이전의 이름인 만세동에서 유래하여 만수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977년 화전정리사업으로 냉골,묵밧추리,산막,파앗재등의 마을이 철거 되었다.
자연마을
만수동 : 옛날 만세암이라는 절이 있어 만세동이라고도 불리던 마을인데 조선 현종 때 충청도관찰사 임의백의 묘가 마을 뒷산에 생가고 토지가 임씨문중의 소유가 되나 그 곳에 만세암을 짓고 승려에게 묘를 지키게 하였으나 불에 타 없어지고 차차 마을이 생기고 마을 사람들이 묘를 관리하게 되어 묘막리라 부르게 되었던 마을이다.
마을봉사자
-
이장
이종섭
-
새마을지도자
공석
-
부녀회장
윤춘산